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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청춘을 어항에다 가두려하는가

하림산책 - 박하림(수필가 / 전 (주)휴비츠 고문)
 누가 청춘을 어항에다 가두려 하는가.
 세상에는 온갖 어항이 많기도 하다.

이념의 굴레, 평생직장이라는 철옹성, 자식의 도리라는 족쇄 등 어항은 즐비하다. 그 어항은 규격품이고 안전하다.

어항 속 맴돌이에 익숙해지면 따로 도전이나 경쟁이 불필요하다. 한 마디로 거기에 포식자인 메기만 없으면 그 세계의 삶은 무난하다.

그 어항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가난한 아버지이거나 이악스러운 고용주이거나 야심찬 왕이다. 저들은 생기발랄한 싹수의 등장에 턱없이 벅찬 기대를 걸고 그 코이들이 고분고분한 일꾼으로 살도록 획책한다.

그건 반발하지 않는 어항 속 맴돌이 일생을 의미한다. 그것을 서약하면 그 순간부터 찬사와 함께 구속의 밧줄이 사방에서 아주 자연스러우나 집요하게 다가와 도리와 의무라는 매듭을 지어 옭아매기 시작한다. 일단 매인 그 매듭은 좀처럼 풀어버릴 수 없다. 

관상어에 코이라는 잉어가 있다. ‘코이의 법칙’에 의하면 그것이 어디서 자라 사느냐에 따라 작은 어항 코이도 되고, 연못에서 살면 한 자 크기로 자란 ‘연못 코이’가 되며, 만약에 강에서라면 1미터가 넘는 대형 ‘강 코이’로 자란다는 것이다.

일테면 싹수라는 코이의 운명은 자칫 지배자들 결정에 좌우될 수 있다.

청춘은 아메리카 신대륙발견에 나서는 콜럼부스의 첫 탐험선 같아서 미지의 희망과 절망, 보화와 굶주림, 성취의 기쁨과 실패의 낙담이 그 배에 하나가득하다.

그런 청춘을 어항 속에 가두려는 건 월권이며 잔인한 간섭이다. 청춘의 싹수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로운 도전에 그 미래가 있고 파묻힌 금광이 있음으로 탐험할 배도 주고 금맥을 파헤칠 곡괭이도 주어야 한다. 어항에다 넣다니 그건 청춘을 모욕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 사울 왕이 있었다. 그는 졸장부에다 신앙심이 약했다.

마치 조선 임금 선조가 백척간두에 처한 조선을 바다에서 힘겹게 지키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뜨르르한 명성을 시기 질투한 나머지 참소 한 마디에 장수를 덜컥 잡아 가둬 나라를 왜군한테 고스란히 바칠 번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이라는 젊은 싹수 대중지도자에게 쏟아지는 신망과 인기를 시기 질투한 나머지 왕은 집요하게 사무엘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옹졸한 선조 임금이 역사의 죄인으로 지금까지 지탄을 받는 것과 반대로 이순신장군의 충절이 나라의 멸망을 구했다 그 멸사봉공을 기리고 있듯이 사울왕은 비참히 죽고 사무엘은 훌륭한 지도자로 살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청춘의 싹수를 시기하여 제 잣대로 재단해서 어떤 명분과 힘으로든 어항에 가두는 건 하느님 법에 어긋난다.

지금 야욕에 눈먼 권력자들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지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청춘 싹수를 너무 헐값으로 쳐 임금의 노예로 부리기도 하고 거리의 철딱서니 전사로도 만들기도 하며 인문도정에서 끌어내 후레자식으로 살게 만든다.

나중에 그들 인생이 어항 속에서 싸구려 맴돌이 인생으로 막을 내리는데 무관심하다. 코이의 법칙을 모른 척한 것이다.

한편, 어항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못으로 간 코이들은 어떤 삶을 살까.

거긴 포식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힘을 기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고, 어항과 달리 먹거리가 풍부하고 소유할 재물이 많아 사는 재미가 넘치고 있는 반면에 어느 것 한 가지도 경쟁하지 않고서는 소유할 수가 없는 살벌하지만 활기찬 경쟁사회다.

민첩하고 슬기로워야 살 수 있지만 싹수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야망을 성취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데다. 다만 공동사회의 윤리나 질서를 존중하고 따르는 자세가 요구되는데 그런 정도에서 어긋난 행동 때문에 그 사회가 혼란과 갈등 반목으로 멍들고 있다.

지금 거기에 사는 코이들은 가치혼돈으로 철딱서니 시위 꾼도 되고 SNS에 중독된 팔로우가 되어 이 바람 저 바람에 날려 뒤따르느라 싹수가 이상변태를 한다.

저들이 임금이 될 왕재가 아니라도 왕을 만들 유권자임으로 저들이 어떤 싹수의 동량으로 자랄 건가에는 나라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한데 저 싹수들이 반해 섬기고 추종할 임금이 없다. 사실은 우리가 국가주권을 빼앗겼거나 아예 망국의 처지로 전락한 역사가 세 번이나 있었다. 다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 탓이었고 무력한 청춘 싹수 때문이었다.

병자호란은 심약한 왕이, 임진왜란은 어리석은 왕이, 일본이 백주에 강탈하듯 궁중으로 난입해 조선을 병탄한 것은 무능한 왕이 임금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조는 나라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질 미달의 왕들이 세습해 통치했다.

임진왜란은 왜군이 보름 만에 한양을 점거할 정도로 왕은 아둔했고 조선은 무력했다. 왜적이 7년간 전쟁에 조선을 얼마나 철저하게 약탈하고 유린했든가 전화를 복구하는데 1백 년이나 걸릴 지경이었다.

그 맥락에서 임진왜란 40여년 후에 조선은 청나라 대군의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놀라 임금이 침략군 수장 앞에 무릎을 꿇어 신하되기를 청하니 조선은 여지없이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세계 어느 전쟁사를 봐도 병자호란처럼 허술한 국방에 그토록 무력하게 항복한 예가 없다. 임진왜란으로 당한만큼 당한 터에 40여 년 동안 국방력강화에 그토록 굼떴든가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 놀랄 일은 병자호란을 겪은 지가 3백 년이 넘었음에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조선왕을 겁박하고 신식무기인 조총부대를 앞세워 범궐, 위협하니 군신이 모두 두려워 떨며 6백 년 사직을 바쳐 을사늑약에 서명했다.

그로써 조선은 일본한테 병탄되어 망했다. 아무리 국력이 약하고 국방이 허술하다 해도 6백 년 사직을 보존해온 나라가 그토록 허약하게 나라를 내주다니 세상에 그런 못난 임금과 조정중신이 어디 또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저런 국치의 역사를 들춰냄은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외교 상황이 너무 어렵고 나빠서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를 만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우리니라가 무능하고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 때문에 혹시라도 저 세 번의 국치國恥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저들이 어항에서 자라느라 큰 못이나 큰 강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단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의 사상은 너무 낡았음에도 현대 패러다임에 맞는 전환이나 변화를 거부하며 유치한 인기영합주의로 실정의 피로를 툭탁치려한다.

실력이 없는데도 완고한 청맹과니 자세라 도무지 개선과 혁신이 없다. 거짓말에 능할 뿐 지혜로운 온고지신에도 굼뜨다. 저들에 보낸 지지나 신뢰와 기대를 철회하려 해도 가뜩이나 불안하고 인기 없는 정권에 타격을 줄까 저어돼 지금 국민은 진퇴양난이다.

그러므로 실정의 책임을 져야 마땅한 집권자들은 더는 청춘 코이들을 자기 진영 어항에 유인하여 가두려 하지 말고 서둘러 실정을 대오각성, 또 다른 국치를 불러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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