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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실명을 통해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다”

故 강영우 박사,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학위, 대학교수로 재직
2003년 사망, 올해로 7주기,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시 美 국가장애위원 역임

2010년 10월 21일 오후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 생명과학관에서 당시 UN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루스벨트재단 고문으로 활동하던 故 강영우 박사가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는 주제로 대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고 있다.(사진=건국대 제공)

“하나님은 저의 실명을 통해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다.”
지난 2003년 췌장암으로 소천한 故 강영우 박사가 자신의 삶에 관해 남긴 말들이다.

강영우 박사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장애 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누나의 사망, 끝모를 가난까지 모두 이겨내고 ‘삶의 희망과 사랑, 꿈’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올해는 강영우 박사의 7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삶에 대한 의지와,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종교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었다.

후천성 소아 녹내장과 사고로 실명
부모님, 누나 사망 후 맹아학교 입학


강영우(姜永祐, 1944년 1월 6일 ~ 2012년 2월 24일) 박사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출생한 그는 후천성 소아 녹내장을 앓았는데 이후 14세(1957년 중학교 2학년) 시절 사고로 공을 눈에 맞아 시각 장애를 앓았다.

이 사고가 나기 아직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갑자기 숨지고 말았다. 그의 누나도 어린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지만, 과로로 죽고, 이와 동시에 세 남매는 서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맹아학교에 들어간 강영우는 점쟁이나 안마사가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깨고 싶었다. 학문을 갈망했던 그는 점자를 배우며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게 된다.

자원봉사자였던 석은옥 여사와 결혼
연세대 차석 졸업 후 미 유학


자원봉사자로 왔던 여대생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중 한명이 나중에 강영우의 아내가 된 석은옥 여사였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원서접수를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연세대학교에도 입학해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석은옥 여사와 결혼 후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까지 얻었다.

이후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조지 W. 부시의 부름으로 미국 국무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분과위원장(차관보 해당 보직급)를 역임했다.

2006년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등의 미국 대통령, 록펠러,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 등과 함께 127인의 위인으로 선정되어 루스벨트 홍보센터 강당의 기념 의자에 기록되기도 했다. 국제로터리 재단 평화센터 평화장학금으로 25만 달러를 기부했다.

2011년부터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
전 재산 국제로터리재단 평화센터 기부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강 박사는 2012년 10월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그는 부인과 가족,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 담담하게 이별을 준비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강 박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아왔다”며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다”고 말했다.

그는 “두 눈을 잃고 한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얻게 됐다”면서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고 강영우 박사와 석진옥 여사.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 받은 삶 살아


시각장애를 지녔음에도 미국 백악관 정책차관보까지 오르는 등 극적인 삶을 살아온 강영우 박사가 2월 23일(현지 시간) 소천했다. 향년 68세. 강 박사는 췌장암 진단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도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 받은 삶을 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을 허락받아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시력을 잃은 것이나 암 진단을 받은 것에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명을 통해 많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이런 인연들을 통해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봉사를 결심할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저서로는 빛은 내 가슴에(기독교방송사), 강영우 박사의 성공적인 자녀 교육법(두란노 서원), 교육을 통한 성공의 비결,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석은옥 공저), 아버지와 아들의 꿈,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내 안의 성공을 찾아라(이상 생명의말씀사 간) 등 영어판을 포함 총 14권이 있다.

아들 폴(진석), 크리스토퍼(진영) 씨가 있다. 안과의사인 폴 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 슈퍼 닥터에 뽑혔으며 크리스토퍼 씨는 2012년 10월 미 대통령의 선임법률고문이 됐다. 큰아들인 강진석 씨가 안과의사가 된 것은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강영우 박사는 고사리 손을 힘껏 모으고 아버지의 눈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던 아들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기억했다.

다음은 강영우 박사가 소천 전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일부분이다.

전쟁이 휩쓸고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책을 쓸 수 있었고 수많은 아름다운 인연들도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몇 자 적어 봅니다.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습니까?

예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쪽이 먹먹해 옵니다.
마음보다 머리로 먼저 생각하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따뜻하게 품고 살아가는 당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나는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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