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김현승 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가 단풍으로 물든 산과 가로수에 시(詩)의 옷을 입혀주는 계절이다.
어느 작가는 가을에 대해 ‘온통 붉은 축제와도 같던 여름이 어느결에 화장하고, 만산홍엽과 조락의 계절이 지금 여기에 당도했다’라고 표현하는데 단풍이 선명한 색깔로 곱게 물든 것은 태풍과 비에 물을 흠뻑 먹었을 때만이 수목이 더 화려한 색을 내는 자연의 이치가 있다.
‘가을의 기도’는 “기도하게 하소서 … / 사랑하게 하소서 … / 호올로 있게 하소서 …”와 같이 ‘기도’와 ‘사랑’과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다.
‘기도’하는 마음을 핵으로 하여 ‘낙엽’과 ‘모국어’를 결합시켜 경건함과 애수를 기도 형식으로 고백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는 절대자, 곧 하나님에게로 자신이 가까이 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와 같이 주님에 대한 사랑은 시간을 두고 가꾸어 가는 성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세속적 욕망과 고뇌를 벗고 가을의 나무가 잎이 지고 앙상하게 중치만 홀로 남듯이 고독하게 본연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굽어 치는 바다’로서의 험한 행로를 거치고 ‘백합의 골짜기’로서의 영광과 행복이 있는 신앙적 길을 따라 내 영혼은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로 상징되는 무욕과 빛의 경지에 이르기를 소원하고 있다.
이 시의 ‘까마귀’는 죽음의 징후가 아닌, 내 영혼과 연계되어 있다.
“빛을 넘어 / 빛에 닿은 / 단 하나의 빛”인 검은빛 이 새는 내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영혼의 새”로 상징되어 절대고독 속에서 삶의 궁극적 경지에 다가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
참으로 가을은 내적 성숙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고, 아름다운 삶의 결심을 맺기 위한 사랑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깊은 가을은 소멸과 쓸쓸함만 남는 낙엽지는 때가 아니다.
신 앞에 겸손하게 져서 하늘 모국어(母國語)로 진실하게 기도하고 사랑하고 하나님과 독대하며 비옥한 경지에 다다르고자 하는 신앙고백이 소망의 가을 기도로 추구되어 보여지고 있다.
김현승 시인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광주에 정착하고 조선대 교수 등을 지내며 서정성이 우러나오는 주옥같은 시를 쏟아냈다.
미션계인 승일초등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녔고, 교회 내에서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로 사상범으로 몰려 물고문과 재판도 받았다.
고단했던 시인의 삶은 1975년 4월 11일 숭전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하다가 쓰러진 뒤 63세에 별세하였다. 신의 언어를 가지고 언어의 직공이었던 그가 추구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시인은 기도하며 영원한 나라로 소천한 것이다.
시편 86편
1절 :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4절 :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2절 :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