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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고아들의 아버지-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치

일본인 최초 문화훈장 추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스승으로, 日 경성감리교회 전도사 재직
일본인 최초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소다 가이치의 묘.

편집자 주
지소미아 종료 문제로 가뜩이나 살얼음판 같던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만 파묻힐 수만 없는 것이 현 시대의 국제관계이며 더우기 한미일 동맹이 더욱 절실한 요즘 한국과 일본, 각각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진 의인(義人)들인 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치와 한국인 재일유학생 이수현씨를 재조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에 파묻혀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망쳐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과 의도적인 갈등을 만들어 정치적인 책략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선거구는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라 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조슈번의 후신이다.

한반도를 제물로 일본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인물들도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정한론을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미우라 고로, 식민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이 모두 이 조슈번, 즉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소다 가이치다.

그는 수십 년간 조선인 고아 수천명을 데려다 키웠고 자신이 키운 아이가 자라 독립운동을 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조선이 해방되자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회개와 반성 운동’을 벌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젊을 때 대주가였으며 혈기왕성하여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불량배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타이완에서 하루는 인사불성으로 마시고 어느 뒷골목에 쓰러져 빈사 상태에 처했는데, 그를 살려준 사람이 있었다. 이 의인은 소다를 부축해 여관으로 옮기고, 먹이고, 재우고, 치료까지 해준 뒤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소다 가이치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은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은인의 나라 조선을 찾아갔다.

조선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후일의 YMCA) 일본어 교사로 일하게 된 그는 또 한 번 변신을 경험한다.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인데 특히 그를 감화시킨 사람은 바로 월남 이상재였다. 소다 가이치가 한국에 온 건 1905년는데 이미 대한제국에 망국의 그림자가 짙어질 때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서 이상재는 기독교 전파를 통해 조선인들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소다 가이치는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다 가이치, 우에노 다키 부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일본어 교사 우에노 다키까지 아내로 맞아 술을 퍼마시다가 죽을 뻔했던 사람이 술을 끊고, 기독교인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1921년 소다 가이치는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 고아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경성 바닥에 널려 있던 고아들,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데리고 오는 와중에 그는 조선인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는다.

“저 왜놈의 자식이 조선 아이들을 어디다가 팔아먹으려고.” 일본인에게는 비국민 취급을 받으면서 조선인들에게도 비난을 들었던 그였으나, 소다는 수십 년 동안 조선인 고아 수천명을 데려다 길러냈다.

고아들은 그를 ‘하늘 아버지’라 불렀는데 일본의 패망으로 1945년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자, 수십 년간 고아들과 함께해온 소다 가이치 부부는 또 한 번 중대한 결심을 한다.

아내는 조선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고 소다는 일본으로 돌아가 패망한 일본을 위한 회개와 반성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한 소다 가이치는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했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해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한의 시가 적혀 있다.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마음 만져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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