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 켄드릭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2006년 100주년기념교회, 서울외국인묘지공원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개칭
1890년 미 공사관 요청으로 양화진 일대 외국인 매장지로 획정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침탈에 신음하던 우리나라의 가난한 국민들을 도왔던 손길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선교사들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선교사들의 헌신을 부정하거나 노력을 폄훼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다.
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매장지로 획정하였다.
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매장지로 획정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매장된 사람은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왕립병원인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활동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에 사망한 헤론(John W. Heron, 惠論)이었다.
처음 획정한 매장지에는 민유지가 약간 포함되어 있었는데, 같은 해 8월에 정부에서 토지 대금을 지불하고 그 관리권을 조약의 규정대로 외국인 거류민 자치 기구에 넘겼다.
주한 외국인들은 외국인묘지협회(Foreign Cemetery Association)를 조직하고, 외인묘지규칙(Regulations for the Foreign Cemetery)을 제정하여 운영하였다.
1893년 10월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5개국 공사들이 조선 정부에 “양화진외인장지” 주위에 담장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96년 12월 러시아공사 웨베르(K. I. Waeber)는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공문을 보내 묘지기가 주변에 산 땅의 소유권 인정을 요청하였다.
1904년 11월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이 “양화진외인묘지 확장 및 진입 도로 보수”를 요구하였다. 그 후에도 이 묘지는 주한 구미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들의 대표가 묘지기를 두고 관리하였으며, 1913년 7월 조선총독부 토지대장에 경성구미인묘지회(京城歐美人墓地會) 소유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구미 외국인들이 철수하고, 1942년 5월 22일 모든 외국인들의 소유를 “적산(敵産)”으로 압류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1946년 10월 1일자로 다시 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기가 변경되었다. 1961년 외국인토지법 제정으로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으나, 1978년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이 묘역이 문제가 될 때까지 ‘경성구미인묘지회’ 대표 언더우드 3세(원일한) 명의로 남아있었다.
1985년 6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묘지소유권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인수하고 묘지 경내에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관을 건축하였다. 1986년 10월 10일 선교기념관을 완공하고, 이 묘역의 명칭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변경하였다.
2005년 7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는 이 선교기념관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고, 이 교회에 묘역과 선교기념관 관리운영에 관한 일체의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였다. 2006년 5월 100주년기념교회는 이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으로 개칭하였다.
묘원의 면적은 13,224㎡로 안장자 수는 15개국 417명이다. 또한 가족을 포함한 선교사 수는 145명이다. 현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이를 관리하고 있다.
무덤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기도 하고 아홉 개 구역으로 나뉘기도 한다. 선교사묘원에는 아홉 구역으로 나뉜 표지판에 각 무덤에 잠든 외국인들을 기록해 두었다.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낸 헐버트의 비문이 감동적이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하노라’고 적혔다.
그의 부인과 아들의 묘역이 모였다. 건너편에는 딸의 무덤도 있다. 본지 97호에서 다뤘던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 소다 가이치의 묘도 있다.
C묘역에는 눈에 익은 이름이 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의 무덤이다.
미국 남감리회 여성 선교사인 루비 R. 켄드릭(1883~1908)의 묘비의 어구도 인상적이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all”
“나에게 천번의 삶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강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