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바리새인들에 관한 위선적 행동에 대해 예수님의 많은 꾸짖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 위선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탄도 나오고 이리로 표현하기도 하고악한 자도 나옵니다. 그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까지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안 나옵니다. 아마도 선을 행하기가 쉽지 않기에 모양이라도 취하고 훈련하기를 바라셨을까요. 글쎄요?
반면 용서는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최근 위안부 인권운동을 한, 모 단체 대표분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어떤 보도에 의하면 성금의 3%만 직접 피해자 분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니 국민들의 자괴감이 큽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시작했지만 어느 날 사탄이 그 마음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을 정죄하기에 앞서서, 예수님 없는, 해 아래에 있는 우리 인간은 이렇듯 나약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실감합니다.
로마서 7장 21~25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모두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 졸졸 따라다니던 회계경리까지 맡은 제자도, 한 순간 사탄이 들어가니 파멸됨을 보면서 가룟인의 처지를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3~5 말씀을 묵상합니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이처럼 사탄은 늘 우리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겠다고 유혹합니다.
이번 기회에 이용수할머니에게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한 시대를 마감하면서 후세들에게 남겨주셔야 할 사명일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증오와 분노로 국제사회의 자유우방인 이웃 일본을 백안시 할 수 있겠습니까?
머지 않아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용서할 자격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할머님이십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한다”고 일본 기독교 단체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무릎을 꿇은 언론보도도 보았습니다.
이제 저들을 용서하고 이 갈등의 세대를 마감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할머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용서” 말입니다. 할머님이 살아계실때 만이 하실 수 있는 고귀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시는 길 일 수도 있습니다. 똑똑하게 말씀해 주십시요.
“후손들아 결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마라, 그리고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마라.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마라.”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잊지 않게 독립기념관에 마지막 소녀상을 세워주십시요.
소녀상은 외국 등 세상사람들보다 먼저 우리가 바라보고 깨우쳐야 할 영원한 민족의 교과서입니다.
용서함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상처받은 할머님들에게 위로와 평강과 자자손손 잘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할머니 사랑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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