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과거시험 모습. |
훌륭한 지도자일수록 인재를 잘 발탁하고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일을 맡겼다.
人事(인사)가 萬事(만사)라고 했듯이 한 번 잘못 임용하면 모든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런 중요성을 알면서도 인사 실패가 잦은 것은 그만큼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인 孔子(공자)도 제자를 잘못 보아서 자책했었던 것처럼 인재를 뽑을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경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1. 以貌取人(이모취인) :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선별하는 것
2. 任人唯親(임인유친) : 팔이 안으로 굽듯이 가까운 사람을 뽑는 것
3. 近水樓臺(근수누대) : 권력자의 주변에 있다하여 능력과 관계없이 우선 발탁 등
반대로 고대 聖君(성군)들은 개인적 친밀도와 관계없이 철저하게 인격과 능력을 위주로 등용하는 立賢無方(입현무방)의 원칙을 지켰다.
이처럼 公平無私(공평무사)하게 어진 사람을 임용(任賢)하면 나라가 길하고(國吉) 興(흥)했다는 말은 고대 先賢(선현)들의 행적이나 일화 등을 수록한 교훈집 劉向(유향)의 ‘說苑(설원)’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인재등용의 여러 사례들 중 중국 고대 齊(제)나라의 16대 임금 桓公(환공)이 管仲(관중)을 발탁했을 때 나라가 흥했고 관중의 사후 후임자를 잘못 선발해서 몰락하게 된 사실을 흥미롭게 강조하고 있다.
관중은 태자 시절 환공을 암살하려 했던 원수다.
하지만 환공은 관중의 능력을 인정하여 재상에 임명한 이후 승승장구, 覇者(패자)가 되어 천하를 휘어 잡았었다.
그런데 환공은 관중이 죽으면서 후임자로 추천한 사람은 배제하고 간신 豎刁(수조)와 易牙(역아)를 중용하더니 결국 환공은 죽고나서 장례조차 치르지도 못하고 세상의 조롱을 당하며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한 때의 인사 잘못으로 명예를 잃고 나라까지 기울게 한 본보기가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大公無私(대공무사) 자세는 공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인품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는 任人唯賢(임인유현)이란 말도 인사원칙상 일맥상통하는 성어다.
일단 맡기고 난 뒤는 의심하지 말고 믿고 끝까지 밀어주는 것도 명심할 일이다.
그렇다고 등용하고 난 뒤 잘못이 드러나고 국민들 대부분이 손가락질 하는데도 그냥 직무를 계속 맡긴다면 그것 또한 나라를 길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패망의 단초가 될 뿐이다.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도 이런 실패한 인사의 사례들을 많이 보고 있다.
공인으로서 기본도리 先公後私(선공후사) 滅私奉公(멸사봉공)의 정신, 능력우선의 원칙을 어기고 사사로운 관계 한패거리 같은 코드를 인재등용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任賢國吉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
글쓴날 : [2020-06-15 18:35:30.0]
Copyrights ⓒ 노년신문 & oldagenew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