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이라는 화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던 대우그룹 고 김우중 회장의 삶과 경영에 관한 일화
지난해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후 사업이 급속히 성장하여 한국기계·대우중공업·대우조선 사장을 겸하고, 1998년 대우그룹의 해체 직전까지 회장을 지냈습니다. ‘세계경영’이라는 화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폈지만 IMF 경제위기 가운데 회장에서 사임했습니다.
본지에 지난호까지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를 연재했던 노재환 목사가 이번 호부터는 김우중 회장과의 대화를 다시 연재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기독교란 무엇이며, 종교와 인간의 삶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 글에서는 ‘김우중’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경영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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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싱가포르 센토사리조트에서 열린 '제20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에서 기조연설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글쓰기에 앞서>
나이 든 우리 노년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힘도 부족하고 번쩍이는 지혜도 부족하고 더더구나 용기도 부족하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세대도 갖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지혜가 있다.
과거를 직접 경험한 역사의 인식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80, 220, 800의 숫자는 60년대 초 5.16 직후 한국, 북한, 필리핀의 국민소득이다.
필리핀의 국민소득이 800 불이었을 때 우린 80불 이었으니 우리의 10배 잘사는 나라였다. 오늘 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노동자로 가사도우미로 한국에 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신나하던 김일 선수의 박치기로 우리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프로레슬링의 현장 ‘장충체육관’ 그 웅대한 돔 형태의 건물도 필리핀 기술진들이 와서 건설해 주었다.
설탕 마저도 수입했던 우리 대한민국이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어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 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한강의 기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렇게 발전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이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 우리보다 세배나 잘 살았던 북한과 비교해 보면 이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며 지금은 우리가 50배는 더 잘 살고 있으니 이 외에 무엇으로 설명이 되겠는가.
간단히 말하면 자유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숭상하는 미국에 줄을 선 것이 공산주의와 반기독교 국가인 소련과 중국에 줄을 선 이북과의 차이점 일 뿐이다.
이번 호부터 10회에 걸쳐 경제를 일으킨 주역들 중에 한 사람인 김우중 회장의 이야기를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전해 주고자 한다.
작년 연말에 타계한 김우중 회장에 대한 연민의 정이 높은 것은, 그의 수고와 땀과 정열과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력에 비하여 너무나 말년이 쓸쓸하게 타국에서 마감된 것이 내내 아쉽다.
삼촌 회사인 한성실업에서 무역을 시작한 그는 독립하여 단돈 500만원으로 도재환사장과 동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해서 넓디넓은 세계를 향해 뛰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세월이 좀 더 지난 후 우리 후손들이 지혜롭게 살펴볼 것이다. 그때 그들이 김우중 회장을 살펴볼 때에 참고가 될만한 내가 아는 이야기를 메모해 두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나갈 것이다.
“내가 콜롬비아를 가려고… LA공항에서 시간을 보낼 때에 저기 멀찌감치에 머리가 허연 중년 신사가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끼니를 때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세히 보니 그가 한참 해외 시장을헤집고 다니던 김우중 회장이었다”고 회고하는 K회장님의 회고를 도움받아 각색한 실화소설이다.
삼류 정치에 일류 기업이 살해당했다 하는 이도 있고, 잘난 IMF에 나라를 팔아 먹은 한국 관료의 적폐라고도 하고, 방만한 경영을 추스릴 참모를 갖지 못해서 자멸했다는 평도 공존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수재들만 다니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으니 특별한 재능을 가졌음은 틀림없다.
노재환 목사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김우중 회장 누구신지요.
노 목사 지난 연말에 훌쩍 떠나셨지만 많은사람들이 회장님 아직 살아계신 줄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회장님 소식과 근황을 전할 목적으로 잠깐 방문했어요.
저는 석모도에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제가 자주뵙는 K회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전 회장님께서 제 모교이기도 한 연세대에 큰 기부를 하신 것으로만 잘 알고 있습니다.
김 회장 하도 송자총장이 졸라 싸서 그랬지 뭐. 아까 저기 보이던데 어딜 갔나 안보이시네. K회장은 사실 나와는 경쟁자였지만 난 맨 땅에서 헤딩했고, 그 양반은 S그룹을 업고 있었으니 땅집고 헤엄쳤지 뭐.
노 목사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김 회장 그렇구나. 나는 뭐 여기서 별 할일이있나. 신문도 없고. 가끔 친구나 보고 예수님 오시면 세상 이야기 좀 하다가 세월이 너무 잘가. 새로 올라오는 양반 있으면 나가 보고, 며칠 전에 홍사덕이도 올라왔데.
노 목사 세상 친구들도 하나 둘 속속 올라오고 걱정 근심 없겠다, 아픈 곳 없겠다, 정말 천국 지낼만 하시겠어요.
김 회장 니도 와보면 안다. 목사긴 해도 새까만 후배니까 말 놓겠네. 여기선 목사도 별볼 일 없어.
노 목사 제가 내려가서 회장님 근황 잘 전할테니 아래 계실 때 재미 있었던 일 좀 많이해주세요.
그래야 우리 신문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고 광고도 많이주시지않겠어요?
김 회장 난 그래도 콜롬비아에 발전기 팔아 먹은 게 제일 통쾌했어. 그때는 한국중공업에서 만들어서 입찰했는데 설비 수송비가 너무 많이 드는거야 .
그래서 다섯 동강이를 내서 싣고 갔지. 운송비를 반으로 줄였지.
콜롬비아 지폐에 아직도 내가 판 발전기 사진이 있어. K회장도 내가 하는 거 보고 그때 과장인가 달고 칠레에 자전거 팔면서 바퀴 분해해서 수송비 엄청 아꼈지.
노 목사 그렇게 운반비가 중요했군요.
김 회장 미국이나 멕시코에서 오면 운반비가 우리와는 경쟁이 안돼.우리는 주로 일본하고 경쟁이었지.
노 목사 회장님 그러니까 생각났어요.
대우실업 문닫았을 때 일본 종합상사 다니는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일본상사 친구들이 말하기를 대우가 안오니까 정말장사할 맛 난다고 했답니다.
그만큼 대우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녔다는 증거죠.
김 회장 자 화제를 바꾸세.
난 상사 주재원을 해외에 내보낼 때 일본 네쇼날의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방법을 썼지.
과회식, 부회식, 회사 회식을 하면서 정신무장을 시키고 비행기에 오를 때 트랩에 직원들을 두줄로 도열시켜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축복했지.
네쇼날은 예도 사열을 해서 비행기에 오르게 해! 사실 그래서인지 날 배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노 목사 회장님 대우가 제가 제대 무렵 인기 좋았어요. 제 친한 친구도 서울공대 나왔는데 삼성 안가고 대우 갔어요.
김 회장 사실 난 박정희 대통령을 아버지같이 여겼어. 박대통령이 정말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볼려고 애쓰는 걸 봤기때문에 나도 있는 힘을 다한 것 같아. 물론 큰 도움을 받았지.
노 목사 박대통령을 어떻게 만나셨어요?
김 회장 아마 63년도 쯤일거야.
박대통령이 제주도 도정 순시를 갔는데 태풍피해 현장 돌보다가 도지시가 더 늦게 도지사 집무실에 도착한거야.
먼저 온 박대통령이 그때는 최고회의 의장일거야 역대 도지사 사진이 죽 걸려있는 걸 보고 김용하 4대 민선도지사의 사진을 보고는 “이 분은 내가 사범학교 다닐 때 교장으로 지내신 스승님이신데 너무나 날 사랑해주셨지.
이분 자제들이 어디있는가 알아보라”고 수행원에게 부탁했지. 며칠 뒤 청와대에서 나와 박정희대통령의 만남이 시작되었지.
노 목사 그 이야기좀 해주셔요.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 노재환 목사
인천 석모도 승영교회 담임목사
학교법인 삼산승영학원 이사장
ROTC 기독장교연합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