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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나누는 김우중 회장과의 대화 2

글쓴이 : 노재환 목사 - 인천 석모도 승영교회 담임목사, 학교법인 삼산승영학원 이사장, ROTC 기독장교연합회 수석부회장
‘세계경영’이라는 화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던 대우그룹 고 김우중 회장의 삶과 경영에 관한 일화

지난해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후 사업이 급속히 성장하여 한국기계·대우중공업·대우조선 사장을 겸하고, 1998년 대우그룹의 해체 직전까지 회장을 지냈습니다. ‘세계경영’이라는 화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폈지만 IMF 경제위기 가운데 회장에서 사임했습니다.
본지에 지난호까지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를 연재했던 노재환 목사가 이번 호부터는 김우중 회장과의 대화를 다시 연재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기독교란 무엇이며, 종교와 인간의 삶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 글에서는 ‘김우중’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경영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2015년 싱가포르 센토사리조트에서 열린 '제20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에서 기조연설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에서 돌아와서 곧 나를 불렀지.
난 영문도 모르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육영수 여사님과 함께 나를 반겨 주셨지.

아버님 얘기를 한참 하시더니 이미 내가 무역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없으므로 수출로 먹고 산다고 나를 매우 치켜 세우셨지. 그리고 대뜸 내게 애로 사항이 없냐고 물으셨지.

그래서 그 당시 가장 힘들었던 사항 두 가지를 말씀드렸지. 제일 큰 문제는 해외에 나가서 신용장을 받아 와도 자본이 딸리니까 만들어서 수출하는데 너무나 힘들었으니까 신용장만 받아 오면 무역 금융을 지원해 주면 너무 좋겠다고 건의 드렸지.

또 하나는 그 당시 일본에서 바이어들이 몰려 왔는데 그 친구들을  접대하는데 접대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어려운 점들을 말씀드렸지. 바로 영부인께서 일본 바이어 접대는 삼청각에서 자기 이름대고 무제한으로 이용하라시는 거야.

“나라 살리시는데 무슨 일인들 못 도와드리겠어요” 하시는거야. 노목사 난 그때 눈물이 핑돌아 눈물을 흘릴 뻔 했어. 며칠 안되어 무역금융제도가 생겨 종합상사들이 신나게 팔러 다녔지. 재미있는 거는 텔렉스로  네고가 끝나고 계약은 되었는데, 신용장 원본이 서울에 아직 도착 안 한거야.

말일날 급여는 나가야 되고 하청업체에게  자재를  빨리 확보하도록 선금은 줘야되고,야 머리에 쥐날 지경이지. 장사가 잘되면 돈은 더 모자라는거 잘 알잖아. 하도 신용장원본이 도착 안되서 한번은 유리창에 대고 신용장 싸인을 가짜로 한 적도 있어. 노목사 이 이야기도 신문에 낼래?

노재환 목사 예수믿는 사람들도 교인들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오히려 은혜가 되듯이 회장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처지를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김 회장 하기야 내가 천국에 와 있는데 이곳까지 와서 내게 시비야 걸겠나?
노 목사 수출하는 거 전쟁아닙니까? 전시라 생각하면 다 이해가 되죠.

김 회장 우리나라 대미수출의 쿼터 할당량 1/3을 대우실업이 했으니, 날 살려 두었으면 지금으로 말하면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두개 있는 거야.
아마 일본을 따라 잡았을 수도 있었어.

노 목사 회장님. 인문계 경영학 전공으로 수출에 정신 없으셨는데 왜 대우중공업을 창업하셔서 골치를 썩히셨어요?

김 회장 그것도 운명이야. 내가 한번  청와대에 불려갔는데 박대통령 걱정이 태산이신거야.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벌어온차관형태의 자금으로 그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공장을 한국기계가 준공은  했는데 팔지를 못한거야.

원래 한국기계의 모체는 1935년경 일제강점기 때 요꼬야마공작소가 인천에 조선기계제작소를 세워 출발했어.

해방이 되어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었다가 다시 한국기계로 출발했지만 제대로 디젤엔진을 팔지를 못한거야.

약 5만대 만들 수 있는 캐파(Capacity, 생산능력)인데 5백대도 못 팔았으니 말이 안되지. 한국산 믿을 수 없다고 안 사가는거야.

삼성, 현대한테 맡아 달래도 안 한다니 나한테 오히려 부탁을 하셨던 거야. 아마  그때 한국기계 사장이 내 경기고 선배님이셨으니 해결책은 자금 여력이 많고 수출 잘하는 대우에 맡겨 보자고 안을 냈을 거야.

내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또 내 생각에 천 짤라서 옷 만드는 일이나 철판 짤라서 기차 만드는 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지. 사람은 늘 생각아 긍적적이어야 돼.

노 목사 새로 설립하신 것이 아니군요.

김 회장 내가 일으킨 기업들 대부분 부실을 인수해서 살려낸 거야. 어떤 사람들은 정책자금 특혜를 받아 다 나랏 돈으로 사업했다고 남의 말 같이 해서 내가 그때는 그  이아무개는 정말 패죽이고 싶었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야.

난 부평공장 다닐 때 통행료 500원도 아끼려고 다른 코스를 잡는데 그 양반이 올린 접대비가 너무 과다해 결재를 계속 안했지.  

이 양반이 그만 꽁하고 틀어진거야.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꿨네. 감투를  쓰더니 앉아서 당했지 뭐. 내가 그때 빨리 변신해서 비볐어야 하는데 말이야.

어쨌든 창립 후 계속 10여년간 적자였던국영기업 한국기계를 일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지.
이게 문제였어 나한테 맡기면 잘 돌아간다는 소문이 나니 새한자동차, 조선공사옥포조선소까지 나한테 떠미네.

자동차는 정말 감히 생각도 못했지. 그래나도 하나님한테 지혜를 구했지.
미국 GM을 끌어들이면 될 것 같더라구. 50대 50으로 대우자동차가 시작된거야.

노 목사 아 회장님 저도 대우차 초창기 시절 르망 모델을 생산해서 수출할 때 전장부분 칵핏시스템을 자동 검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었지요. 대구 인근에 있는 다이오드 공장에도 자동체크시스템을 개발해 주고 돈 좀 벌었어요.

대우가 하니까 바로 현대 쏘나타 라인에서 연락이 와서 재미 많이 본 적도 있습니다.

김 회장 대우에서 배워서 현대에 팔아먹었구먼.
노 목사 솔찍히 그렇습니다. 그 기술은 지엠 계열 델코사에서 갖고 온 것을 국산화했지요. 티코라인에도 팔았어요.
그래서 .그때 우리 회사 차는 모두 대우차였습니다.

김 회장 우리 협력업체는 당연히우리 꺼 사줘야지 안 그래?
기업을 안해 본 사람들은 사업의 어려움을 잘 몰라. 옛날 이야기지만 내가 가발 수출로 뛰어다닐때 수주는 해왔는데 머리카락이 시골에서 잘 안나오는거야. 머리카락이 있어야 가발을 만들지.

어쨌는지 알아? 고등학교에가서 수출해야되니 학생들 머리 짜르면 학교에 피아노기증하겠다고 했지. 학교에 피아노 기증하고 학생들 머리를 짤라 왔으니.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지금 아이들은 이해가 안될꺼야.

노목사, 자네가 학교도 운영하니 우리 아이들 잘 가르쳐라. 부탁한다. 요새 아이들은 가난이 뭔지 굶주림이 뭔지 모른다.
자네가 필리핀 이야기와 베네주엘라 이야기 잘 했데.

노 목사 회장님 다음에는 중동에서 고생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김 회장 아직 국가기밀인데. 농담이야.
노 목사 천국오시면서 다 해제되었어요.

글쓴이 - 노재환 목사

  • 인천 석모도 승영교회 담임목사
  • 학교법인 삼산승영학원 이사장
  • ROTC 기독장교연합회 수석부회장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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