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지방 하가점하층문화와 고조선 문화의 특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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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초기 기자가 동래한 옛 조선 |
또,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고동북유형 종족을 지구과학에서 밝혀낸 대로 이 시공간에 존재했던 맥족으로 특정하면 이들은 고조선의 중심 종족과 일치한다.
한편, 하가점상층문화 시대는 대체로 BCE 1400년~BCE 700년인데, 이 문화를 이끈 종족유형이 고화북유형이므로, 고조선의 맥족이 이 시기에 요서지방을 떠났음이 문헌사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하가점하층문화 시대의 말기는 중국 商나라 초기로, 당시 신흥강국이었던 상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 주변국가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쪽에서 중원지방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商族은 BCE 17세기 주변의 종족국가들과 연맹을 맺으며 商나라를 성립하였다. 상의 정치체제는 중앙에 商왕과 직할지가 있고 지방에 자치권이 있는 방국들을 두는 제도로, 商왕의 권한이 크지 않았고 세력권은 황하 유역의 중원지방에 머물렀다.
그러면 고인골 연구에서 나타난 하북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를 발달시킨 고화북유형 종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종족이었을까 ?
商의 동북 방국은 고죽국(孤竹國)이었다. 고죽족은 BCE 17세기 이전에 하북성의 북경 및 연산 일대에 고죽국을 세웠고, 상을 건국한 탕왕(湯王) 18년(BCE 1600년경)에 商의 동북쪽 방국(方國)이 되었다.
따라서, 하북성 연산 일대와 내몽고 자치주 적봉 지역은 고죽국이 위치한 지역으로 하가점하층문화의 하북성 분포지역과 중첩되므로 하북성의 하가점하층문화를 영위한 고화북유형 종족은 고죽족이라고 판단한다.
한편,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를 영위하던 고동북유형 종족을 중국 사서를 이용하여 추론해 보자.
조선에 관한 最古 문헌인 《관자》보다는 시대적으로 조금 늦지만 ‘조선’의 존재를 웅변적으로 알려 주는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나타나는 유명한 기록이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全)》, 《사기》 <송미자세가>,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서 “기자가 조선에 가서 조선을 세웠다”라는 것이다.
이 기사와 연관된 문헌 기사들을 요약하면, “BCE 1046년 중원 서쪽 지방에 있던 周族의 武가 商을 멸망시키고 周나라를 세우자, 商의 귀족이었던 기자와 그를 따르는 상의 유민들은 옛 조선의 땅으로 건너가 ‘조선’을 세웠다.
이를 전해들은 무왕은 外臣 제후국의 통치술로 기자를 ‘조선의 왕’에 봉하였으나, 기자를 신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이때 기자와 함께 이동했던 상의 유민들은 기자족과 상의 패잔병들로서 연나라와 고죽국의 사이로 국가통치력의 공백지대인 난하 하류 유역 일대로 이동하여 ‘조선’의 이름으로 소국을 성립하였는데, 周에 반발하는 고죽국과 기자조선이 연합하고, 요서지방 동부에 있는 고조선이 가세하여 주나라 동북 국경을 침략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주의 무왕이 ‘기자조선’을 주의 외교적 ‘후’로 바꾸어 이들의 결속을 방해하여 국경 침략의도를 분쇄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BCE 11세기 이전에 고조선은 요서지방에 존재하였다가 어떤 이유에서 요서지방을 떠났고, 중국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요서지방의 이런 지정학적 상황에서 기자의 유민 무리가 큰 어려움이 없이 난하 하류 유역에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BCE 11세기 이전의 요서지방에 고조선이 실존했던 것은 문헌적으로 증명이 되지만, 반면에 더 이상의 고조선의 역사 행적에 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분석하여 이들이 고조선일 가능성을 추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조상이 실존했다고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요동지방의 선사시대 문화와 추정하려는 하가점하층문화를 비교하여 요동지방의 예족 문화와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의 동질성이나 승계여부를 파악한다.
다행으로 유사한 목적의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대체로 두 지역에서 발굴된 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비교하여 동질성 여부를 판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옥 장식이 같다’, ‘돌무덤 묘제가 같다’, ‘석조 성곽이 같다’는 등으로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주인공이 요동지방 문화의 중심인 고조선인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두 지역의 유적과 유물은 외형상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문화적인 세부 내용에 차이가 큰데도, 이를 무시하고 외형상 동질성만으로 이를 고조선인의 문화로 주장하는 학설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찬반양론을 감안하여 두 문화의 동질성과 주인공을 판단하는 주요 문화적 특성을 비교한다.
1) 비파형동검 문화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에서 청동기 고조선 문화의 지표유물인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비파형동검의 발굴 분포는 그림과 같은데, 이는 하가점하층문화가 韓民族과 관련된 문화이었고 나아가 분포의 집중도로 보아 고조선과 직결된 사회라는 훌륭한 증거이다. 또한, 발굴된 비파형동검의 분포 상태를 보면 비파형동검은 대릉하 유역 일대에서 발달되었고 이어 요동지방·만주지방·한반도에 차례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추정하지만, 요동지방이나 요서지방에서는 전혀 발굴되지 않는 청동기 유물로써, 시기적으로 후대의 문화이고, 문화의 주체도 요서지방의 맥족이나 요동지방의 예족이 아닌, 한반도의 韓族이므로, 세형동검 문화는 구별되어야 할 문화로 판단한다.
2) 석곽묘 묘제 문화
하가점하층문화의 무덤은 장방형(長方形) 수혈토광묘인데 목관, 석판, 벽돌 등을 이용하여 관 구조를 만들었다.
어른과 어린이의 무덤은 크기와 구조에서 차이가 있고, 어른의 무덤에서는 격·관·우 등의 토기가 부장되었으며, 무덤을 채운 흙 속에서 가끔 돼지가 순장된 채로 발견된다. 규모가 큰 무덤에서는 격과 관 토기가 2쌍 혹은 3쌍 부장되었고, 규, 작 등의 주기(酒器)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같은 석묘계라 하더라도 요서지방 하가점하층문화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나타나는 묘제는 석곽묘(돌덧널무덤)인데 반하여, 요동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는 묘제는 석관묘(돌널무덤)로서 석관묘는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걸쳐 매우 넓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묘제인데, 요서와 요동은 지역별로 묘제의 세부 양식이 달라 문화권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사시대 우리 조상의 묘제로 인식한 지석묘(탁자식 고인돌)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 집중적으로 조영되어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아예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난다 해도 요동-한반도 지역과 바닷길로 이어져 있는 해안 지대에 조금 존재한다.
따라서 지석묘는 요동-한반도 북부의 특징적인 묘제인 것이며, 이 지역이 요서지방이나 한반도 남부 지역과는 구별되는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