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를 招, 흔들 搖, 지날 過, 저자 市.
속에 든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아는 체하며 요란스레 떠벌리는 사람에 딱 맞는 속담이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 빈 깡통이 시끄럽다’ 등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많이 알 수록 겸손해야 덕이 있는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면 외면받고 따돌림 당한다.
또 믿는 구석이 있거나 알량한 권력을 쥐게 되면 아무 곳에서나 거들먹거리며 눈에 뵈는 것이 없고 모든것을 자기 발아래로 본다. 특히 우리 나리 정치현실에서는 이와같은 꼴불견 사례들을 매일 접하고 있다.
옛 중국 齊(제)나라 명재상 晏嬰(안영)을 모시던 馬夫(마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건방 떨며 의기양양했다는 晏子之御 (안자지어)라는 성어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남들의 주의를 끌려고 허풍을 떨며(招搖) 으시대며 시장바닥을 지나간다(過市)는 제목의 성어는 이와 같은 뜻으로 허장성세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려는 행동을 비유하고 있다.
春秋時代(춘추시대, 기원전 770년~403년) 때 魯(노)나라의 孔子(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전파하고 이를 정치에 접목하기 위해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13년 동안이나 周遊列國(주유열국)했지만 가는 곳마다 냉대를 받아서 별 실속이 없었다.
심지어 鄭(정)나라에 갔을 때는 길마져 잃어 초라한 모습에 喪家之狗(상가지구, 상갓집 개) 취급도 받았다. 陳(진)과 蔡(채)나라로 갈 때는 하급관리 隊副(대부)들이 국경을 막는 바람에 제자와 함께 굶주려야 했던 陳蔡之厄(진채지액)도 당했다.
공자가 제일 먼저 방문한 나라는 衛(위)였다. 당시 위나라 왕 靈公(영공)은 어리석어 임금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宋(송)나라에서 시집 온 부인 南子(남자)가 영공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
공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南子(남자)가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몇 번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만나러 들어가 보니 휘장을 사이에 두고도 남자의 허리에 찬 구슬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고 한다.
공자를 유혹하려는 남자의 행위에 같이 갔던 제자 子路(자로)는 분노했지만 공자가 이를 말렸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나 영공이 남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문을 나섰을 때다.
공자가 뒤따르는 수레를 타고 가면서 보니 영공과 남자는 화려한 장식에 거드름을 피우며 시장바닥을 지나갔다(使孔子爲次乘 招搖過市之 사공자위차승 초요과시지).
이에 공자는 위나라의 정치수준에 실망하여 위나라를 떠나 曹(조)나라로 향했다. 사마천의 ‘史記'(사기)의 孔子世家 (공자세가)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흔히 완장을 채워주면 갑자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목에 힘이 들어가고 거만해 진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정치사회에서 갑자기 권력을 쥐고 득세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는 예다.
대통령을 돕던 캠프의 인사들이 국민여론 따위는 안중에 없고 기고만장하여 파렴치한 탈법과 거짓 변명에, 위선을 보란듯이 당연시 하며 되레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를 치는 작태가 非一非再(비일비재)하다.
뽑아준 투표자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세를 과시하며 한 몫 챙기기 특권 누리기에만 급급하다.
사회적 약자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부정축재 사리사욕을 챙기고도 가증스런 미소를 띠고 다니는 전직 위안부단체의 長(장)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법을 먼저 지켜야 할 법무부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이 그릇된 자식사랑으로 위법 범죄를 자행하고도 이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일삼는다.
자신의 범법행위를 되레 큰소리 치며 법지식을 이용, 괴변으로 정당화 시키려는 뻔뻔한 행위야말로 招搖過市 요란한 빈 깡통이요 빈 수레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