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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읽는 한국의 기원 -선사시대 고조선 11

최현수 교수(KAIST 공학박사/전 건양대학교 Prime 창의융합대학 학장)
그러나, 우리가 선사시대 고조선의 역사 해석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고조선의 원시국가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황하유역의 중원지방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여러 종족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원기국가체계가 일찍이 발달하였던 중국의 경우에도 BCE 17세기에 商나라의 성립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는 현실과 비교하여, BCE 20세기 이전에는 동북아 지역에 종족들의 갈등이 높지 않아서 국가체제의 필요성이 높지 않았는데도 고조선이 먼저 원시국가를 형성했다고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은 고조선 원시국가의 성립 여부가 아니라, 고조선의 정치적 정체성을 물어야 하는 문제이다. 

동아시아에서 국가의 효시로 보는 원시국가는 중국의 商나라이다. 상나라는 중원지방에 商族이 성립한 나라로, 상족은 원래 중원 북방 종족이었는데 일찍이 융성해지며 남하하여 중원지방을 차지하였고, 주변의 종족국가들과 방국연방체를 형성하며 BCE 17세기에 商나라를 세웠다.

이 역사 기록을 근거로 동북아의 국가형성을 추론하면, BCE 17세기 이전에 중원지방과 그 주변 지방에는 여러 종족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같은 시기에 고죽족은 하북지방에 고죽국이 형성하였고 BCE 16세기에 상나라가 패권을 잡자 상의 방국이 되었다.

고죽국의 동쪽 지역인 요서지방의 맥족도 주변의 사회발전과정을 인지하였을 것으로 고죽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고조선을 성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고죽국과 고조선은 홍산 문화를 승계한 하가점하층문화를 각각의 분포지역에서 발달시킨 종족으로서, 고조선이 비슷한 시기에 원시적인 종족국가를 성립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문제는, 형성 당시의 고조선의 정체성 즉, 정치체제이다. 선사시대 고조선의 정치제도에 관한 고대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 동북아의 지정학적 환경과 사회발전 정도로 추정하면, 당시 종족국가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부족장연합체’ 정도로서 이후 상나라의 정치제도인 ‘종족국가 연맹’과 체제의 복잡성과 통치지역의 규모가 매우 다른 것으로, 후대 상의 정치제도와 비교하여 고조선의 국가 형성 여부를 논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은 요서지방에 분포하여 살았던 씨족이나 부족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한 '부족장연합체' 정도의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다.

부족장연합체는 대체로 부족장들과 국왕으로 구성되었는데, 부족장은 자기 부족에 대한 통치권과 소유권이 인정되었으며, 왕은 국가를 대표하고 공동체의 신(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고, 부족장연합체 내외부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부족장은 세습하며 자기 부족 공동의 도구나 자산을 제공하는 대신에 부족민 생산물의 공출을 받았을 것이고, 왕은 특정 가계에서 배출되었으나 특정한 역량이 인정되어 부족장연합이 추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우리 문헌에 고조선의 국왕을 ‘단군왕검’이라 칭했는데 이는 모두 어떤 직책을 의미하는 말로써, ‘단군’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란 말이고, ‘왕검’은 통치를 주관하는 통치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왕은 제사장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자로서 특정한 역량을 보여야 했고, 전쟁에서 패하거나 대가뭄의 피해가 발생하면 불신임을 당해 교체되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고조선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제정일치의 사회체제이었을 것이다.

부족장연합체 국가는 형성과정은 쉽지만, 외부와 전쟁이나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국력을 모아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이유로, BCE 12세기 商 무정의 방국 정벌 시대에 고조선은 쉽게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BCE 12세기 상나라 무정의 방국 정벌에서 요서지방의 고조선은 무정의 방국 정벌 대상이 아니었으나, 북쪽의 귀방(鬼方)·강방(羌方)·토방(土方) 및 산동 지역의 이방(夷方)과 용방(龍方)에 밀려난 종족들이 요서지방의 여러 지역에 동시에 이동해오자, 왕권이 미약했던 고조선은 국력을 모아서 이들을 막을 수 없어, 고조선의 지배층은 무너지고 중심 종족인 맥족의 부족들은 요서지방 동부의 대릉하 유역과 요하 유역 사이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요서지방에서 오랫동안 존속했던 고조선의 단군 왕조는 소멸되었고, 요서지방 동부의 고조선은 왕이 존재하지 않고 토착 부족들과 이동해온 부족들이 혼합되었고 사회적 통치는 부족장들이 각각 자치적으로 통치하되 공동체에 관한 일은 부족장들이 협의하여 처리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요하 유역 일대에 살던 맥족의 다른 부족들도 연쇄적으로 요동지방 및 한반도 북쪽 지방까지 이동하였고, 그곳에 살던 ‘예족’과 섞이며 우리 민족의 구성 줄기인 ‘예맥족’으로 통합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조선과 商나라 사이에는 직접적인 전쟁이 없어 중국 역사에 기록된 행적이 없고, 또한 고조선과 정벌된 방국 난민들의 갈등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므로 중국 史書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史書에서는 商나라 무정의 방국 정벌로 고조선이 소멸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BCE 1038년 무정 8년 조선은 도읍을 동쪽 장당경으로 옮기고 단군은 아사달 부근의 산으로 들어가 산신령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무정 왕 이전에 난하 하류 유역의 아사달에 있던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무정치세에 요서지방의 동부 대릉하 유역으로 이동하였고, 고조선의 단군 왕조는 소멸하였음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요서지방 동부에 이런 상태에 있던 고조선에, BCE 11세기에 상의 귀족이었던 기자와 함께 상나라 유민들 및 난하 유역에 살던 맥족의 부족들이 <조선>이란 국호를 갖고 이동해 왔는데, 중심 종족은 여전히 맥족으로 상의 유민인 기족과 상족의 일부를 수용하면 되는 일이었고, 서로 내세울만한 정치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고조선의 정치제도인 부족연합체 정도의 국가로 통합하는 것은 용이했고, 왕위를 둘러싼 갈등은 신흥 강국인 周나라의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있었으므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에 봉했다는 것으로 외교적 영향력이 있었던 기자를 고조선의 왕으로 추대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BCE 12세기에 소멸된 ‘고조선 단군 왕조’를 대신해, BCE 11세기는 ‘고조선 기자 왕조’가 시작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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