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왜군(倭軍)이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조선이 길을 내 달라는 명분 없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산군과 명종 대에 사대사화(四大士禍)로 인한 조정의 혼란과 선조 즉위 이후 당쟁의 격화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이후 일본을 통일하고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20만명이 넘는 육군과 수군으로 침략했습니다. 관군과 의병, 수병 등의 결사항전에도 한양성은 함락되고 선조께서는 평안도 의주(義州)로 피난을 갔습니다.
1592년부터 1598년 7년간의 왜란으로 조선은 나라의 형체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보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록된 조선시대 인구(人口)를 보면 태조 4년(1395)에 3십2만여만명이었고 세종 14년(1432)에 7십6만여명에서 중종 38년(1543)에는 4백2십여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110여년이 흐르면서 3백 4십여만명이 증가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여년 전에 4백 2십여만여명이었으니 증가 추세로 보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5백여만명에서 6백만여명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왜란 7년이 지난 40여년 후 인조 17년(1639)년의 인구는 1백 86만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대략 3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줄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300여만명이 전사를 비롯하여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왜란의 후유증으로 당시 백성들이 인상살식(人相殺食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일까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하고 잔혹한 삶을 살았는지가 짐작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반도 전체가 왜군과 전쟁으로 농경지와 산야도 거의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모든 궁궐들은 물론, 불국사 등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부터 보존되었던 사찰 등과 문화재, 특히 조선 왕조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 등이 소실되고 많은 서적과 도자기, 범종, 탑(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문화재가 약탈되었습니다.
특히, 왜국의 잔인성은 왜란 중 전쟁의 공로를 확인하기 위해 왜군들에게 조선의 백성들을 죽이고 그 수급(首級)을 베어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수급의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니 귀를 베어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귀는 2개이니 하나뿐인 코를 베어오라고 해서 왜장들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면 그 숫자를 세어서 왜장들에게 상훈을 내렸다고 합니다.
일본 교토를 방문했을 때 우리 민족의 치욕과 한(恨)과 분노를 느껴지는 귀무덤(耳塚)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코 무덤’인데 안내판에도 이총(耳塚)이라 하고 괄호 안에 비총(鼻塚)이라고 써 있습니다.
여기엔 조선인 12만 6000여명의 코를 묻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조선 태종(1403)이래 유지되었던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우면서 조선 통신사를 초청했습니다.
조정 내부에 여러가지 찬반의견이 있었지만 선조 40년(1607)조선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504명이 갔으니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고 하겠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자기들 특히 쇼군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대의 행사이므로 모든 비용은 초청자가 부담하였고 막부의 호위 군사만도 8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의 체면을 세워주는 큰 결단을 내리고 지난 날의 역사의 흠결을 묻고 새로운 시작을 했습니다.
2019년 10월 22일 전후(戰後)에 태어난 일본의 ‘나루히토(徳仁)’ 일왕이 세계 평화와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2020.9.16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뒤를 이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을 했습니다.
일본이 이제는 달라졌으면 합니다. 새로운 왕, 새로운 총리가 가장 가까운 이웃 우리나라에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죄를 진 것을 인정하고 만천하에 깊이 사과하고 새출발을 했으면 합니다.
왜란의 폐허 속에서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결단을 일본이 배웠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후세들에게 좋은 이웃의 관계를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