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이 성립 및 소멸한 시기는 선사시대로서 국가의 행적을 기록한 고대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하고 유적이나 유물도 대부분이 유실되어, 문헌 기록이나 물증의 분석으로 역사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BCE 11세기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중국 사서에 고조선의 실존을 확인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기사가 나타나는데, 箕子朝鮮의 성립 과정과 이후에 기자의 행적에 관한 기사들인데, 周初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에 조선이 등장한다.
여기 등장하는 조선은 기자가 건너간 고조선(단군 왕조)과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기자 왕조)으로서, BCE 11세기경 중국인은 연나라 동쪽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조선’을 과거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한국 문헌과 중국의 고대 문헌의 기사를 종합하면, “BCE 2333년 ‘맥족’의 일부 부족들은 대릉하와 요하 사이 지역에 고조선을 형성하였고, 이들은 맥적이 분포하였던 요서지방의 중서부와 난하 유역에 고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체제를 전파하였다. 도읍은 대릉하 유역의 ‘장당경’에서 능원 부근의 ‘아사달’로 또 ‘백악산 아사달’로 말기에는 다시 ‘장당경’으로 이동하였다.
▶선사시대 고조선 초기의 세력권은 요서지방이었고 중심 종족은 맥족이었다. 한편, 요서지방의 하가접하층문화 시대는 BCE 2000년 ~ BCE 1500년이었고 중심 종족은 고동북아계열의 맥족으로 시공간과 중심 종족이 겹쳐진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개국이후 초기 500년의 기간이 되며, 최초의 도읍지 장당경에서 요서지방 아사달로 도읍을 이동했던 역사 기록과도 시공간이 일치한다. 따라서, 요서지방의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의 성립 초기 500년의 문화로서, 이 문화의 기록이나 유물들은 선사시대 고조선의 역사이다.
▶당시 종족국가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부족장연합체’ 정도로서, 후대에 나타난 상나라의 정치제도인 ‘종족국가 연맹’과는 제도의 복잡성과 통치지역의 규모가 매우 달랐던 것으로서, 두 국가의 정치제도와 국가의 정체성이 다르다고 고조선의 국가 형성을 부정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며, ‘부족장연합체’ 정도의 정치제도를 갖는 고조선을 국가로 볼 것이냐 여부인데, 옥저나 부여 등도 유사한 정치제도인데도 모두 국가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 고조선의 정치제도는 부족들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한 '부족장연합체'라고 추정한다.
부족장연합체는 부족장들과 국왕으로 구성하는데, 부족장들은 자기 부족에 대한 통치권과 소유권이 인정되었고, 왕은 국가를 대표하여 내외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신(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 부족장은 세습하며 공동의 도구나 자산을 제공하는 대신에 생산물의 공출을 받았고, 왕은 특정 가계에서 나왔으나 특정한 역량이 인정되어 부족장연합이 추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상나라 전성기의 강역은 황하 유역의 중원지방을 중심으로, 동북쪽으로 산동지역과 발해 서안 유역 및 난하 서쪽 지방과 하북성 내륙 지역이었다.
상의 정치제도는 종족국가인 방국의 연맹체로 商의 중심지에 상왕의 직할지를 두고 특정 임무를 담당하는 귀족을 임명하였으며, 지방에는 방국 왕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방국이 있었다. 상은 상왕과 지방 방국의 왕이 분할통치하는 체제로 상의 왕권이 취약하였으나, 차차 왕권이 강화되었고 말기에 이르면 상왕이 방국을 압도하였다.
▶商 무정은 변방의 방국들을 정벌하여 전성기를 맞았는데, 서쪽의 공방(邛方), 남쪽의 호방(虎方), 동쪽의 이방(夷方)과 용방(龍方), 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과 토방(土方) 등을 지속적으로 정벌하여 최대의 강역을 확보하였다.
북서쪽의 귀방 정벌에 동원된 병력 10만3천명에 무려 3년에 걸쳐 집중 공략하였고, 무정의 왕비 부호(婦好)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방 및 강방의 정벌에 나섰다. 동쪽의 산동지방에 있던 이방(夷方) 및 용방(龍方)의 정벌로 동이족(東夷族)은 산동반도와 일부는 요서지방으로 밀려났다. 서방과 남방에 대한 정벌전도 해마다 벌여 서남방으로도 영토를 넓혔다.
▶무정의 방국 정벌로 동북아 국가들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북쪽의 귀방(鬼方)·강방(羌方)·토방(土方)에 대한 정벌전쟁에서 북방족의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하여, 이들의 일부는 서쪽의 광활한 몽고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동남쪽의 요서지방의 북부로 이동하였다.
한편, 이방과 용방의 정벌로 밀려난 동이족의 일부는 산동반도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발해 서해안을 거쳐 난하 하류를 넘어 요서지방 남부에 이동하였다.
요서지방에 자리한 고조선은 중원지방에서 멀어서 무정의 정벌 대상은 아니었지만, 정벌에서 밀려난 여러 방국의 난민들이 요서지방으로 여러 곳에 동시에 이동하자, 고조선은 이들을 저지하지 못하고, 맥족 부족들은 집단으로 요서지방 동부의 대릉하 유역에서 요하 서안까지에 이동하였고, 고조선 단군 왕조는 소멸하였으며, 요서지방 동부의 고조선은 왕이 없이 부족장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하북성 북부에 살던 유목민인 고죽족이 번창하며 연산(燕山) 일대로 남하하여 고죽국(孤竹國)을 형성하였다.
고죽국은 BCE 16세기에 商 왕실의 묵태(墨胎)가 왕이 되며 상의 방국이 되었고, 이후에 하북성 당산(唐山) 일대까지 남하하였고, BCE 12세기 商의 무정이 이방(夷方)을 정벌할 때 동쪽에 진출하여 난하 서안 유역까지 차지하였다.
무정의 뒤를 이어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紂王)도 강력한 동방 정책을 취하자, 고죽국은 난하를 건너 대릉하 서안까지의 요서지방에 세력을 넓혔다.
商이 멸망하고 周가 세워지자 商의 혈맹 방국이었던 고죽국은 周와 적대관계가 되었고, 대신에 周의 동북방 제후국이 된 연(燕)나라의 세력에 차차 밀리며 난하 서쪽 영역을 모두 빼앗기고 중심 종족이 요서지방에 이동하였다.
이때 고죽국은 난하 동안 유역에서 발해의 북쪽과 대릉하 서안 유역에 걸치는 요서지방 서부를 차지하였고, 중심지는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 지구이었다.
▶이리하여, BCE 11세기 요서지방은 서부에는 고죽국이 동부에는 고조선이 위치한 2국의 병존체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