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민중의 아편(칼 마르크스)이고,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들의 아편(레몬 아롱)이라면,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아편이다. '어린 왕자'에 '길들여진' 수억의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언어학자이기도 한 고종석 작가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가진 '어린 왕자' 번역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어린 왕자'처럼 살지 못하는 수억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며 이같이 밝혔다.
'어린 왕자'는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이다. 고 작가가 삼인출판사와 함께 펴낸 이번 '어린 왕자'는 원서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기존 번역본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고 작가는 "'어린 왕자'는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은 번역된 텍스트라고 알고 있다. 그렇게 많은 언어로 번역됐다는 건 이 작품이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라며 "'어린 왕자'가 비루한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적 동화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이 책을 거듭 읽은 것은 이 책이 내 아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내' 한국어판 '어린 왕자'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며 "젊을 때부터 여러 차례 읽은 책이라 그런지 번역 기간보다는 책으로 만들어지는 게 더 오래 걸린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내용이야 다른 번역본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 책의 한국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오자'는 있을 수 있어도 '오역'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오자가 하나도 없다는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오역은 하나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긴가민가한 것은 끝까지 파헤쳤다. 한국어 결정판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는 "기존 번역본들과는 다르게 한국어가 프랑스어 쪽으로 바짝 붙어있다"며 "프랑스어 구조에 가깝게 대화와 지문을 배치한 첫 번째 한국어 번역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화와 지문을 한 문장 안에서 분리하지 않고 원서가 채택한 프랑스 문학의 말하기 방식 표기를 존중했다. 단 글자 색깔을 통해 대화와 지문을 구분했다.
고 작가는 "긴 문장의 경우 어느 것이 대화이고 어느 것이 지문인지 독자들이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출판사에서 색을 다르게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일일이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 많았다"고 감사함을 표했다.
여러 개를 의미하는 '들' 역시 의도적으로 살렸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어로 '강들', '바다들' 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프랑스어가 가진 특유의 감각을 살릴 수 있도록 일부러 이런 부분들을 살렸다"고 전했다.
'어린 왕자'를 여러 차례 읽은 그가 좋아하는 문장은 무엇일까. 그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를 꼽았다. 또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역시 애정 어린 문장으로 손꼽았다.
"사실 어른들이 실제 어린 왕자처럼 살 수는 없지 않나. 책을 읽는 동안이라도 환상에 빠졌으면 좋겠다."
2012년 절필을 선언했던 그는 2015년 언론사 연재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후 2017년 뇌출혈로 수술을 한 뒤 2019년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 작가는 "사실 뇌가 예전같지는 않다. 지금도 제 말이 어눌하지 않나"라며 "책을 내겠다는 욕심은 없는데 글은 계속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오랜만에 시집 해설에 대한 청탁을 받고 글을 써서 넘겼는데 반응이 좋았다. 뇌출혈 전과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며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글을 쓰고 싶다. 시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