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정치학 박사
질곡의 시대를 살아온 89세 원로 전 명지대 법정대학장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양아들 전 명지대교수 이인수 박사는 1961년부터 지금까지 57년째 이 대통령의 생가인 이화장을 지키며 살아왔다. 질곡의 역사를 경험한 89세의 원로 이인수 전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만나 역사의 진실과 교훈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이인수 박사님, 안녕하세요? 귀한 말씀을 들으려고 새해 벽두부터 찾아왔습니다. 하와이는 잘 다녀 오셨는지.
어서 오세요.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미주총회 김남수 목사님 초청으로 안사람과 함께 미국 씨애틀, LA로 해서 한 바퀴 돌고 지난 달 21일 귀국했습니다.
2018년은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대외적으로도 위험하고, 대내적으로도 분열이 심해 참 걱정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세워 놨는데 나라의 정체성(Natioal Identity)이 흔들리는 것 같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아프리카 후진국도 아니고. 우리가 반만년 역사를 지닌 민족인데 국가의 정체성은 무시당하고, ‘헬 조선’이라니요. 수 천 년 내려온 자연과학 법칙을 맘대로 뜯어 고쳐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괴로울 때가 많아요. 우리가 문명국인가? 하는 착잡한 생각까지 들어서 말을 안 하고 넘어가기가 힘드네요. 젊은이들의 기백이 죽은 것 같습니다. 비전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비극입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두 분이 해로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예. 제 안사람(조혜자 여사)은 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스위스 ‘페스탈로찌아동촌’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1968년 저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아들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이곳 이화장에서 줄곧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22년간 시어머님으로 잘 모신 참 착한 사람입니다.
이승만 박사님의 양아드님이 되시는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저의 아버님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친자가 없으셔서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큰아들인 강석씨를 양자로 들이셨는데 1960년 4. 19 혁명 직후인 4월 28일 권총으로 친부인 이기붕 부통령, 어머니 박마리아 여사와 남동생 등 전 가족을 다 쏘고 자신도 자살하셨잖아요?
그 때 아버님은 대통령직을 사임하시고 이곳 이화장에 머무르시다가 3개월 정도 요양을 하실 생각으로 하와이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이 하와이로 가신 뒤에 아버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시던 이순용 내무부장관께 다시 양자를 두고 싶다고 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6대 독자이신 아버님이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기면 불효라는 생각이 강하셨기 때문에 양자를 들이려는 의지 또한 아주 강렬하셨을 겁니다. 연세도 드시고… 그 때 아버님의 연세가 86세이셨습니다.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 손이었던 아버님께서 17대 중에서 대학 나오고, 미혼이고, 가정교육이 잘 된 집안이면서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골라 보라고 하셔서 자식 될 만한 사람을 물색하다 보니 문중에서 저를 양자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책임이 너무 막중해 더 좋은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순용 내무장관께서 “전주 이씨들이 대통령님을 잘 모셨더라면, 그 어르신이 말년에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으셨을 것 아니냐?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을 드릴 의무가 있다. 자유를 존중하는 분이시니까 아들 노릇을 잘해라”고 해서 결국은 설득을 당하고 말았지요.
당시 경기도 양주 교육감이셨던 이승용 생부께서도 “정말 어려운 자리이니,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저는 운명적으로 이승만 대통령님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양자가 결정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날부터 아버님께서는 제가 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기다리셨습니다. 하와이에 계신 아버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출국수속을 하느라 시간이 걸리게 되자 아버님께서는 “그 놈이 나를 좋아 한다면서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서둘러 빨리 와야 하는 게 아닌가?”하시면서 종종 거울을 들여다 보고 “그 녀석도 나를 좋아 하겠지?”라고 프란체스카 여사님께 농담도 건네셨다고 들었습니다.
양자라 하더라도 자식이 생겼다는 것이 86세의 고령이셨던 아버님께는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물론 어머님도 제게 정말 친자식 이상으로 잘 해 주셨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는데.
사적인 아버지와 국민의 아버지,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릴 수 있겠는데요. 사적인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보고 앉아 있으면 내 손을 가만히 만져 주셨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차이가 나는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이야기도 참 많은 데요.
아버님이 1934년 제네바에 가셨다가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를 만나 결혼하신 건 아시죠? 그때 나이가 아버님은 59세이었고, 어머님은 34세이었어요. 아버님은 독실한 기독교인 이셨는데 늘 굳은 믿음을 가지셨어요. 6.25 때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데,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리고 인정도 많고 예지력도 대단히 뛰어나신 분이셨어요.
볼셰비키 혁명 이후로 등장한 공산당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찬양 할 때 “공산당은 결국은 망할 것”이라고 하셨고,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역설 하셨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계셨을 때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내용의 책 ‘Japan inside out 일본 내막기’을 영어로 내셨는데, 그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참, 그 책을 만드실 때 이야기인데요. 어머님이 세 번이나 타이핑 하시느라고 손이 짓무르고 아프셔서 무척이나 고생을 하셨답니다. 아버님이 인세를 받자마자 그것을 어머님 타이핑 수고비로 주셨는데, 그 돈으로 어머님은 검정예복을 사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한국에 오셔서 이 곳 이화장에서 사실 때 그 옷을 저의 안사람에게 물려주셔서 지금은 안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적으로 아버님은 참 로맨틱 하신 분이셨어요. 미국의 워싱턴에 가면 조지워싱턴 생가가 있는 포토막강이 있는데요, 포토막강 가에서 아버님이 어머님께 들려주시던 러브 송 하나를 공개하겠습니다.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아리랑 러브 송이라 할까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오다가 가다가 만난 임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는다.
국민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아버님을 말씀 드린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없어진 나라를 찾아주신 분이십니다. 내가 1931년생이니까, 일제 때도 살았습니다.
그 때는 일본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저는 나라를 빼앗겼다는 걸 초등학교 2학년 때 알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궁성예배라는 것을 했는데 황국신민으로서 황국 폐하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인데 난 그걸 하기가 싫어서 안했습니다. 남의 나라에 충성맹세를 하는 것은 틀린 것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는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어서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아버님께 “나라를 되찾을 수 있나요?”하고 물었더니 “글쎄다. 우리나라에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도 가 있고, 중국에도 가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미국이라는 곳은 배를 타고 2주일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아주 먼 곳이었지요. 할아버님께서는 “이 분들이 잘하면, 언젠가는 우리가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하시면서 나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아버님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의 아버님 이승만 박사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신 저의 아버님 우남 이승만 박사님(1875.3.26.~1965.7.19.)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배재학당 영어학과를 졸업하시고, 활동하시다가 반정부활동 혐의로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출옥 후 민영환의 도움으로 국권수호를 위한 밀사로 미국으로 건너가셔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그때 존 헤이 미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셨습니다.
그 후, 미국에 계시면서 조지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하셨고, 하버드대학 석사를 마치셨고, 훗날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되시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프린스턴 대학 윌슨 총장님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아버님은 조선왕조 말 개화기의 선각자로 언론과 구국운동의 선봉에선 독립협회 운동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립투사이신 셈이죠. 반정부운동 혐의로 1899년부터 5년 7개월간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에는 조국의 ‘현대국가 건설’이라는 구상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민족주의와 근대화 그리고 자유민주의 사상입니다.
1919년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케 하였고, 아버님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되셨습니다. 그해 5월,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부를 설치하시고 ‘Republic of Korea’ 라는 영문 국가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
6월18일에는 일본천황에게, 일본군대와 일본인관리의 철수를 요구하셨습니다.
앞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버님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을 담은 ‘일본내막기’라는 책을 저술 하셨고, 전쟁 중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국제승인과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참전, 그리고 미국정부에게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제안도 하고 경고도 하시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친소정책을 추구하던 미국은 아버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한국문제를 등한시 하였습니다. 이런 중에 아버님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국내의 동포들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했고, 끝내는 미 전략사무국과 교섭하여 미군과 광복군 내에 한국에 진입시킬 한국인 특수부대를 편성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참전 약속을 받아내며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스탈린과 비밀리에 약속하였습니다. 그 후 소련의 대일 참전과 북한 공격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미소 양군에 의한 ‘38선 분단 점령’이라는 민족분단의 비극이 생겨났고, 이는 바로 미국이 아버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역대 정권들이 다 그렇지만 전직 대통령을 폄하하고 잘한 점, 즉 공은 숨기고 잘못된 점만 크게 부각시켜 전 정권의 흔적 지우기를 하다 보니 지금까지 11명의 대한민국의 역대대통령들이 피살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 자살을 하는 등 모두 다 불우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살아서, 지금 옆에 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1961년, 제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되어, 하와이로 찾아 가서, 아들로서 인사를 드리고, 아침 저녁 식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저는 아버님을 마음 속으로 깊이 존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때 묻지 않은 기상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정을 보면서 아버지를 만난 것을 감사하게 되었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긍지가 생겼으며, 진짜로 한국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매일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로 하시다가 제가 간 후로는 한국어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 축복을 내려 주소서’하고 아버님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애국심과 신실한 믿음으로 매일 매일 정성껏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독립운동을 하시고 구국운동을 하시고 정치를 하신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명령을 달성 하시려고 하시는 일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일평생 살아오면서 유언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님이 곁에 계시다면 “하느님, 저희 한민족에게 깊은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젊은이 여러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노예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소신껏 살아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와이에 갔을 때, 4.19때 희생된 대학생들에 대해 “학생들이 참 장하다. 내가 맞을 총을 그 아이들이 대신 맞았어”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그 학생들 때문에 쫓겨났는데도 “학생들이 정말 장해! 청년들의 의기가 없으면, 나라가 망해!” 라고 하시면서 숨진 학생들과 유가족들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시민들은 탑골 공원에 있던 아버님 동상을 새끼줄로 묶어 끌고 다녔고, 남산공원의 장비로 머리가 잘리는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아버님이 행정적인 부분에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분은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세웠으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선택하여, 대한민국이 크게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잘살 게 된 근원이 아닌가요? 우리가 러시아나 독일처럼 실패한 공산주의체제를 선택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곳 이화장과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예, 이곳은 종로구 이화동 1번지인데 아버님이 거처하시면서 이화장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해방이 되어 아버님께서 미국에서 오셨는데 처음에는 호텔에 계시다가 잠시 돈암동과 마포에 계셨었는데, 불편하시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게 알려지자 권영일씨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집을 사셔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이곳은 아버님 내외가 사시던 본채, 별채, 내각을 구성하고 발표하셨다는 조각당과 부속 건물로 되어있습니다. 1988년 8월 15일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내외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동상이 있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에도 가끔 오셔서, 정원과 뒷산을 산책 하시곤 하셨고, 하야하신 후 이곳에 머무르시다가 하와이로 가셨습니다. 서울시 기념물 제 6호로 지정 되었다가 2009년 4월28일 사적 제 497호로 승격되었습니다.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간단히 하라고 하시니까, 어머님은 33살 때 25년 연상의 아버님과 결혼하여 평생을 굶주리며, 아버님을 도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두 분이 결혼 하실 때 아버님이 “여자는 눈에 띄기만 해야지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대요. 또 아버님은 부모, 남편, 자식을 따르라고 ‘삼종지의 안빈 낙업’이라는 족자도 써주셨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이곳에 오신 후론 일주일에 한번 아버님 산소에 가시는 게 유일 한 외출이셨습니다. 어머님은 “내가 죽으면, 성경과 태극기, 그리고 틀니도 관에 꼭 넣어 달라”고 하셔서 돌아가실 때 그렇게 해드렸습니다. 어머님의 유품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시는 묵주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격변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오신 대 선배님으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훈이나 도움이 되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나라가 많이 힘듭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고, 북핵도 참 위험 합니다.
참 걱정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선명한 비전과 꿈이 있어야 하기에 그들에게 꿈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른들이 솔선수범해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계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자꾸 이상한 짓만 하려고 드는데 행복은 평범한 가운데 있습니다. 일도 안하고, 자식도 안 낳으려하고, 그러면 국력이 약해집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면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박사님 내외분 장시간 귀한 말씀 해주셔 감사합니다. 늘 건강 하시고 오래도록 해로하십시오.
조달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