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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만세’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십 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의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사촌언니 유예도, 중앙은 지도교사였던 박인덕.
“선생님!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십 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 선생에게 보낸 옥중편지 내용이다.

감리교도였던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구한말 유빈기, 조인원 등과 함께 흥호학교를 세워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던 선각자였고, 어머니 역시 선교사들을 통해 독실한 신앙심과 근대적인 여성의식을 갖추었던 신여성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익혔고, 생활 속에서 식민지 체제의 부당함을 체험하면서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3월 1일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이문회(以文會)를 회원인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했다.

3월 13일,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천안행 기차에 올랐다. 고향에서 그녀는 아버지 유중권의 주선으로 청신학교와 교회를 찾아가 교사와 학생, 신도들에게 서울에서 벌이지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3월 31일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고 봉화를 올렸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10대 소녀의 기도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간절함이 묻어있는 기도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 도중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에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당했다.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얼마 후 법정에 선 유관순은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조선병탄에 대한 부당함을 역설하고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한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

그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일본인 재판장은 유관순에게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녀가 판결에 항의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 끊임없이 저항했던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에는 동지들과 옥중만세운동을 벌이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독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형기를 3개월 남겨둔 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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