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가상현실/그리하여/증강현실//1백 20년 이내로 슬픔이 사라진다//다시 태어난 나/무엇으로 살거나/물로 살거나/불로 살거나” (‘어느 날 1’)
올해 만 85세를 맞은 고은 시인의 창작열은 이전보다 더 타오르는 듯하다. ‘어느 날’이라는 제목으로 1번부터 217번까지 번호를 붙인 시들을 묶어 시집 ‘어느 날’(발견)을 냈다. 시 전문지 ‘발견’의 청탁을 받고 쓴 ‘어느 날’ 연작 87편을 겨울호에 발표한 뒤 이 시들을 책으로 묶는다는 얘기를 듣고 추가로 더 써 3개월 사이에 217편의 시를 뚝딱 써냈다고 한다. 애초 ‘발견’ 측은 10편 정도의 시를 청탁했으나, 시인의 창작열은 이를 훨씬 뛰어넘어 한 권의 두꺼운 시집을 내놓은 것이다.
시들은 모두 짧다. 제목처럼 어느 날 시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불교의 선(禪)문답처럼 한두 마디씩 풀어놓은 듯하다.
시인은 이런 짧은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1960년대부터 단시를 쓰는 버릇이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며 여기에 이른다. 저 중앙아시아 알타이 고원이나 거기서 더 서쪽인 스카타, 이들에게 지향 없이 이어지는 구비서사의 긴 음영(吟詠)은 어느덧 해 뜨는 한반도의 나머지까지 그 핏줄이 이어진다.
그래서 나의 유서 깊은 서사본능은 몇 개의 장편 시편들 낳고 또 낳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역정의 시 가녘에서 단시의 반증이 나선다. 솥뚜껑 위 참깨인 양 튀어 오르기도 하고 두메 샘물로 넘쳐나기도 한다.”
시는 짧은 한두 줄로 끝나지만, 참선하는 수도자들이 진리를 찾으며 주고받는 대화처럼 그 안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다.
첫 번째 시 ‘어느 날 1’에서 시인은 현실이 가상현실을 넘어 증강현실로까지 이어지는 시대에 인간 감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슬픔이 남아있을지 걱정한다. 타인의 고통에 점점 둔감해지는 현실, 소통을 외면하며 외로움을 얘기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시도 있다.
“밥 먹을 때/밥 먹지 못하는/아프리카와/남아시아/어디/어디를 생각하지 않는다//어쩌다가 생각해도 그 생각 바로 넘긴다//TV 유니세프 광고/굶주린 아기 휑한 눈/얼른 다른 데를 돌려본다/거기는 화장품 광고이다 미인이다” (‘어느 날 104’)
시인의 오랜 화두인 한반도의 굴곡진 현대사를 노래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들도 있다.
“우남(이승만의 호)은 성공한 실패/백범(김구의 호)은 실패한 성공//이것 밖에 없는 한국 현대사 후기의 빈곤으로/나 여기까지 왔나//자 어디로 가나” (‘어느 날 48’)
문학평론가 이형권은 “‘어느 날’에는 여전히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과 부면들에 대한 통찰과 관련되는 비판과 저항 정신이 번뜩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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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18-01-25 13:08: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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