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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읽는 한국의 기원 - 선사시대 고조선 5

최현수 교수(전 건양대학교 Prime 창의융합대학 학장, KAIST 공학박사)

또, 홍산-소하연-하가점하층-하가점상층 문화를 이룩한 종족들과, 전국시대 이후 문헌기록에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나타나는 투르크계-몽골계-퉁구스계의 유목민 종족(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고 등)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은, 문헌적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몽고족은 BCE 7세기나 되어서야 요서지방에 출현하였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여러 문화를 발달시켜왔던 고동북유형 종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종족이었을까?

이 연구에서는 발굴한 고인골과 현대인종의 모계유전자(mtDNA)의 근접도 분석도 이루어졌다.

아래 그래프는 이 문화유적의 대표적 발굴지역인 대릉하 유역의 대전자묘에서 발굴한 여성 고인골의 유전자와 현대인종들의 모계유전자의 근접도를 4분면에 표시한 것이다.

그래프에서 붉은 표식의 고동북유형의 고인과 가장 가까운 현대인 종족이 ①조선족, ②일본인, ③한국인으로 나타났다.

이 그래프가 말해주는 것은, 요서지방의 하가점 하층 문화를 영위했던 종족은 오늘날의 조선족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종족으로, 선사시대에 발생했던 동북아의 지각변동 이후 韓民族 조상들이 분포했던 시공간에 비추어보면 하가점 하층 문화의 주인공은 ‘맥족’임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와 고대의 우리 국가들의 역사 흐름을 보면 맥족 부족들은 고조선의 멸망 후에 지배계층과 많은 부족민은 집단으로 요동지방이나 한반도로 이동하였지만, 일반 거주민은 요서지방에 여전히 남아 지금의 조선족을 형성했을 것이므로, 이 연구에서 보이는 근접도가 나타나는 현상을 충분한 역사적 타당성을 지닌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일본인이 현재의 한국인(남한인)보다 조선족과 더 가까운 현상은, 요서지방의 조선족과 한국인 및 일본인은 오천여년 전 동북아 지각 변동 이전에 황해 대평원에 함께 살았던 인종들인데, 지각변동에 따라 이들이 요서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각각 이동하였으므로 모두 조상의 뿌리가 같고,

후대에 요서의 맥족이 조선족이 된 것이고 한반도의 한족(韓族)이 한국인(남한인)이 된 것이며 일본열도의 왜족이 일본인이 된 것이니, 이들의 유전자들이 유사한 것이 정상적인 것이며, 조선족이 일본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는 것은 기나긴 역사에서 남한의 한족은 한민족으로의 통합이나 외침에 의해 종족의 혼혈이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 홍산 문화(紅山文化)
 훙산 문화는 BCE 4500년경~BCE 3000년경 중국의 요녕성의 내몽골 자치주 적봉시 일대, 하북성의 연산(燕山) 일대에 분포한 신석기시대 중기의 문화이다.

유적과 유물은 츠펑(赤峰),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 곳에서 발견되었고, 거대한 제단(壇)·신전(廟)·적석총(塚) 등이 발견되어 원시국가 체제를 갖춘 정치집단이 존재했었다고 추정한다.

홍산 문화의 분포지역은 선사시대에 한민족 조상 종족의 거주지와 일치하고 있어, 고조선 형성의 기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발해연안문명’의 발원지로 인식하기도 하고, 주변 지역과 문화적 차별성이 뚜렷하고 규모가 방대하여 ‘홍산문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홍산 문화에 이어 소하연 문화 - 하가점 하층 문화 - 하가점 상층 문화가 발달되었다. 이 중 하가점 하층 문화를 발달시킴 종족과 이들이 영위한 시공간이 선사시대 고조선의 종종 및 시공간과 중첩되어, 하가점 하층 문화와 선사시대 고조선의 문화가 동일한 것이냐의 관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한 지역에 대한 선사시대의 역사 연구에서 정치집단의 존재를 추정하게 하는 유적과 유물 특히 청동기 유물의 발견은 그 지역에 형성된 국가의 존재여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므로 매우 소중한 자료로 간주 된다.

그런데, 홍산 문화의 분포지로 알려진 하북지방과 요서지방에서 대규모 신석기 유적과 유물 및 청동기 초기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 유물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이나 황하문명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물보다 제작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산동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동이계 문화인 ‘북신문화’, ‘대문구문화’, ‘용산문화’가 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홍산문화와 관련된 별도의 연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홍산 문화의 발견으로 중국은 과거의 ‘황하 중심의 문명 전파설’에서 시대적으로 앞서있는 홍산 문화를 인정한 '다중심 문화론'을 펼치게 되었다.

다중심 문화론의 내용은 홍산 문화의 중심 종족이 동이족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종족을 굳이 밝히지 않고 대신에 문화 속지주의(屬地主義) 원칙에 따라 동이족을 중국의 종족에 포함시키고 ‘홍산 문화는 중국의 문화’라는 것이다.

중국은 다중심 문화론을 바탕으로 현재 중국 역사 공정은 문명 공정으로 비화하여 홍산 문화를 홍산 문명으로 격상시켜, 중국의 문명이 인류 문명의 시초라는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한편,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황하 유역 변방의 강자인 ‘치우 천황’과 그의 세력 기반이 되는 황하문명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다른 문명을 논리적으로 인정할 수 없어서, 신화로 여겨왔던 ‘헌원 황제와 치우 천황 간의 탁록 전쟁’을 중국의 정사(正史)로 인식하게 되었고, ‘헌원 황제’는 황하 문명을 ‘치우 천황’은 홍산 문명을 각각 상징하는 하는 것으로 하여 ‘치우 천황’의 근거지로 홍산 문명의 분포 지역을 비정하였다.

훙산 문화의 사회활동은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취하는 등의 수렵과 채집을 위주로 하는 생활방식으로 시작되어, 중기에는 돌 기구를 사용하는 기초적인 농경이 시작되며 신석기시대에 진입했다.

또한, 야생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사육하는 목축업도 발달하여 돼지와 양 등을 길렀다. 정치사회적으로는 씨족이나 부족 단위의 집단생활을 넘어서는 여러 부족들이 연합한 형태의 정치구조가 형성되었고 무력(武力)을 갖춘 지배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홍산 문화의 주요 유적은 서 요하 상류의 지류인 황수(潢水) 및 토하(土河) 유역에 퍼져있고, 이곳에서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세석기 등으로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도구이며, 돌보습(石耜),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농기구 종류가 많아 홍산 문화 사회는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홍산 문화 후기 유적지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청동기 유물인 환도 등도 발견되어, 홍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시대가 도래했다고 판단한다.

묘제는 어떤 종족의 생활상·정신세계·정치제도 등이 녹아 들어간 특징적 문화현상인데, 중국 화화족의 묘제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묻거나 목관을 묻는 형식의 널무덤(토광묘)의 양식인데 반하여, 산악과 평지가 섞여있는 요서지방의 동부·요동지방·한반도 지역에서는 주로 돌무덤을 양식을 사용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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