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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나누는 김우중 회장과의 대화 3

글쓴이 : 노재환 목사 - 인천 석모도 승영교회 담임목사, 학교법인 삼산승영학원 이사장, ROTC 기독장교연합회 수석부회장
지난해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후 사업이 급속히 성장하여 한국기계·대우중공업·대우조선 사장을 겸하고, 1998년 대우그룹의 해체 직전까지 회장을 지냈습니다. ‘세계경영’이라는 화두로 공격적인 경영을 폈지만 IMF 경제위기 가운데 회장에서 사임했습니다.

본지에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를 연재했던 노재환 목사가 김우중 회장과의 대화를 다시 연재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시골 목사가 답하다’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기독교란 무엇이며, 종교와 인간의 삶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 글에서는 ‘김우중’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경영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2015년 싱가포르 센토사리조트에서 열린 '제20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에서 기조연설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노재환 목사  아프리카와 중동 등 해외건설 진출 얘기 좀 해 주세요.
김우중 회장 1977년 우리 대우가 수주한 에콰도르 도로포장 공사가 아마 국내 건설업체 해외 진출 최초 기록일 걸.

그리고 78년도에 아프리카 수단에 타이어공장을 수출한 거야. 역시 우리나라 최초 플랜트 해외수출 사례야.

내가 생각해도 우리 대우가 장사는 잘 했어. 타이어는 내가 늘 수출하는 품목이어서 잘 알고 있었고 또 설비는 한국 기계에서 갖고  가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 공장 준공 하는 날 난리가 났어. 한국의 날로 선포하고 내가 수단 최고 훈장을 받았지.

노 목사 우리 학교에 이디오피아에서 온 학생이 한 명 있어서 지도 책으로 아프리카 공부를 좀 했어요. 이집트 밑에 수단, 수단 밑에 이디오피아, 이디오피아 밑에 소말리아 홍해 건너 예멘 아닙니까.

김 회장 이집트  왼쪽에 지중해를 길게 끼고 리비아가 있는데 잘 살았어. 북아프리카에서는 그 당시 제일 돈이 많은 나라였어.

노 목사 70인역 성경번역한 알렉산드리아가 리비아 땅인가요?
김 회장 아니야.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야. 지중해 연안을 길게 접하고 있어 수산업도 많고 트리폴리를 통해 중계무역도 발달되었지.

그래도 석유가 쏟아져 나와서 하루 아침에 부국이 된거야. 노목사도 지리공부 좀 해라. 카다피가 집권 당시 의과대학공사를 따고 첫 진출을 했지.

내가 국내에서 세브란스공사를 한 게 큰 도움이 되었지. 그리고 계속 리비아의 비행장 공사를 수주해서 잘 완공시켜 주었더니 오더가 밀려 들어온 거야. 다시 비행장을 건설 해달라는거야. 기가 막히게 공사를 끝내주었더니 계속해서 도로 건설, 주택, 학교, 화력 발전소, 섬유공장, 오수시설, 호텔 등등. 그야말로 줄줄이 사탕이었어.

그 당시 리비아는 이북과 더 가까웠지. 미국 하고는 아주 관계가 안 좋았어. 재미있는 것은 미국이 카다피 집을 폭격 한다고 내게 정보를 줘서그 얘기를 미리 알려줬지. 아니나 달라. 일주일 후에 미국이 카다피 집을 폭격 했어. 카다피는 나 때문에 목숨 구했지.

노 목사 그렇군요. 그래도 리비아 하면 한국사람들은 대수로 공사를 늘 떠올립니다.
김 회장 그래. 대수로 공사는 현대 대우 등이 입찰에 참가했지만 동아 최원석 회장이수주했지.

콘크리트 배관생산기술이 동아가 큰 장점이었어. 최회장이 선친 반대에도 밀어부쳤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이었어. 1,870km 정도 되니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왕복 거리야. 그걸 직경4m 길이 7.5m 75톤 되는 콘크리트관 수십만개를 연결 했으니 참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단해. 후일 세계불가사의에 들어갈꺼야.

내가 알기로는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리비아에서 365억달러 이상 건설 수주를 했다고해. 아마 그중에100억불 정도는  동아건설이 차지할 거야. 그리고 대우가 100억불 정도 될 거야.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닌가.

우리가 여러가지 프로젝트로 건설한 수출 대금을 리비아는 석유로 줄 때가 많았어.  별 수 있나. 주는 대로 받아야지. 할 수 없이 벨기에의 안 돌아가는 정유공장을 하나 사서 돌렸지. 그랬더니 나중에는 이란도  원유를 사 가라는 거야.

노 목사 그때 대우가 이란 등 중동에 자동차들 엄청 팔아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석유 사 달라고 하는 건 당연하죠. 대우차 르망생산라인에 제가 친구의 도움으로 큰 프로젝트를 해서 잘 알지요.

김 회장 그 당시 늘 대우가 우리나라 수출액10~15%를 해냈지. 지금 삼성은 더 많이 수출하지만  말이야. 그때 국가적 차원에서라도 우리 대우를 죽이는 게 아니었어. 대우를 살렸으면 삼성이 두 개 있는 셈 아닌가.

어쩌면 일본도  따라잡았을거야. 지금도 내가 정확히 기억하지만 IMF 직전 우리 대우가 186억 달러를 수출하고 수입은 43억 달러로 143달러 무역흑자를 냈어.

노 목사 그런데 왜 99년 대우가 갑자기 워크아웃 신청을 하게 됐나요?
김 회장 노 목사, 이 얘기는 길고 복잡해.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결국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이 꼬이게 된 거야. 정부가 삼성 편에 선거야. 삼성자동차 빚을 내가 고스란히 떠 안으라고 하는데 말이야. 돈도 안주면서.

노 목사 자동차 빅딜은 누구의 아이디어 였나요?
김 회장 하나님 앞에 맹세 하지만 난 아니었어.

노 목사 멈춰 선 삼성공장을 빨리 돌리려고 K 경제수석이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책에도 나옵니다.
김 회장 자동차 이야기는 너무 머리 아프다. 그만하자.

노 목사 IMF 외환위기는 금융제도상의 문제에 따라 발생되었다고 보는 견해를 저는 들었습니다.
김 회장 그렇게도 볼 수 있지.

그 당시 외자도입 허가는 재무부와 금감원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3개월 이상은  허가 사항이고 3개월 미만은 신고사항이었어. 노 목사도 정부기관을 상대해 봤겠지만 허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까탈스러워.

그러니 많은 기업들은 쉬운 신고제 3개월 짜리로  단기로 계속 계속 연장해 가는 게 일상이었어. 그리고 이 단기는 외화관리 통계에 잡히지 않는거야. 제도적 큰 모순이었어. 좀더 합리적으로 쉽게 승인해줬으연 누가 단타로 돈 빌리겠나.

그런데 갑자기 DJ 정부가 들어서니 돈 주던 양반들이 머뭇머뭇 거리기 시작하면서 연장을 안해준거야. 해외 자금 돈줄들이 DJ정부를 매우 불안하게 본 거지. 그 당시 단기 외화 자금들은 관리에서 빠져 있었고.

전에는 쉽게 연장해 주던 단기 자금들이 줄줄이 막히다 보니 외환 보유고는 금새 바닥이 났고, 우리나라는 투기자본들의 먹이감이 된거야.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거지.

역사가 다시 평가 하겠지만 그때 ‘배째라 하고 버티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방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이 줄줄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야. 아마 영원히 못찾아 올 수도 있지.

노 목사 그때 좋은 기업들도 너무 많이 외국 자본에 넘어갔지요. 흥농종묘 같은 회사가 외국자본에 넘어간 것은 너무나 속상한  일 입니다. 제 거래처였기 때문에 잘 알지요.

김 회장 정말  그때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좋은 기업들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 것은  DJ 정부의 큰 실책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노 목사 98년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99년에는 대우 워크아웃, 2000년에는 김대중 김정일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 해 말  나라는 거덜났는데, DJ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대북송금문제로 2003년에는현대그룹 회장이 투신자살 한 사건이 지금도 그  일 때문에 아랫동네는  시끄럽습니다.  그 때 넘어간 돈으로  북한이 핵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시각이 우세 합니다.

김 회장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난 이북을 무수히 다녀왔어. 그때는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셋이서 20번 이상 만난 것 같아.

노 목사 찐한 접대도 받으셨겠네요.
김 회장 노목사 자네가 날 그렇게보나. 난 자제했지.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아니가. 그랬더니 나중에는 와이프를 데리고 오라 해서 같이 간 적이 있었지. 김주석과 우리 안 사람은 격의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눴어.

노 목사 회장님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같은 또래 아니었습니까?
김 회장 김위원장이  나보다 6년 아래지.
김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는 생각도 많이 달랐어. 나하고 음성을 높힌 적도  있었지.

노 목사 그때 감정이 IMF 때 DJ한테 회장님  손 좀 보라 한거는 아니겠죠.
김 회장 만나면 물어 보려고 하는데 통 만날 길이 없네. 이야기가 딴곳으로  샜네.

그때 남북기본합의서는 완성되고  정상회담을 94년 7월 말 열기로 했지. 내가 김주석 사망 열흘 전까지 북한에 있었어. 내가 서울로 돌아온 후 남북 정상 회담 보름쯤  남겨두고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한 거야. 참 아쉬운 일이었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서 김주석한테 물어보려고 해도 만날 길이 없고. 노목사가 아랫 세상에서 알아봐서 내게 알려줘.

노 목사 그런데 남북 정상회담은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카터 대통령이 방북해서 남북한 정상회담을 주선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 회장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카터 전 대통령이평양에 왔지. 난 20번 이상 김주석을 만난 사람이야. 나는 김 주석에게 빨리 정상회담을 하자고 설득 했지. 카터를 핑계 삼아 정상회담이 성사된  셈이야. 카터가  평양을 떠난 후에야  내가  서울로 돌아왔어. 이 정도면 내가 성사 시킨 것 아닌가. 노 목사가 솔직히 판단해 봐.

노 목사 김주석은 그때 만나 보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만났겠네요.
김 회장 김주석도 그렇고도  김 위원장도 그렇고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곳에 있는지 이곳에서는 안 보여.

사실은  그 이전에 노태우 대통령이 방북 하도록  내가 주선을 한 적이 있지.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노 대통령이 큰맘 먹고 북한을 한 번 갔어야 하는 건데.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  대통령은  생명도 내 놓고 배짱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이었으면 갔을 거야.  그때 두 정상들이 왔다갔다 했으면 지금처럼 이런 상황은 안 왔을지도 몰라.

노 목사 회장님 생각에는 94년 7월 말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두고  왜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 했다고 보십니까?
김 회장 내가 추측하기로는….
<다음호에 계속>

글쓴이 - 노재환 목사
인천 석모도 승영교회 담임목사
학교법인 삼산승영학원 이사장
ROTC 기독장교연합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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