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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앞둔 시인, ‘삶을 노래하다’

‘섬 시인’ 이생진 신작 시집 ‘무연고’ 출간
방학동 뒷산 공동묘지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다

‘묘지 사용료를 성실히 납부합시다

체납된 묘는 무연고 처리됩니다’

무연고 처리

죽어서 서러운

무연고 처리

무연고 묘비 앞에 앉았기 민망해

내가 슬그머니 일어선다

- 무연고 전문 -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먼 섬에 가고 싶다’ 등으로 알려진 ‘섬 시인’ 이생진(89)이 신작 시집 ‘무연고’를 펴냈다. 작년 10월에 낸 시집 ‘맹골도’ 이후 1년 만에 내는 신작으로, 통산 38번째 시집이다.

우리나라 섬 3천여 개 가운데 1천여 곳을 다녔다는 시인은 그동안 시에서 주로 섬과 바다를 노래했는데, 이번 시집은 구순을 맞아 자신의 삶과 일상을 기록한 일기에 가까워 보인다.

작년에 아내를 떠나보냈다는 시인은 외로움과 함께 노쇠한 몸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슬픔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무연고’는 그런 쓸쓸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다. ‘병病과 나’에서는 자신이 먹는 약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어찌 보면 자꾸 살려고 떼쓰는 것 같아/치사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황금찬(1918∼2018) 시인 등 먼저 떠난 선배·동료 시인들을 그리워하거나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한다.

“노인들은 점점 기우뚱거리니까/서로 의지하려 한다/옆에 앉은 내게 사탕 하나 주며 몇 살이냐 묻는다/89요 했더니/자긴 77이라며/3년 후엔 자기도 80이라며/내 얼굴을 뚫어지게 본다/부러워하는 것인지/어쩐지 말이 없다/늙어가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만/걸어가다가 쓰러질 확률이/점점 많아진다는 것은/확실하다” (‘노인들끼리’전문)

그러나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쓰고 기운을 내며 생(生)의 의지를 다잡는다.

“아내는 가고 돌아오지 않지만/나는 살아서 친구와 전화할 수 있어 좋다/카톡을 할 수 있어 좋다/농담을 할 수 있어 좋다/살아 있다는 거/그게 죽어 있는 것보다 낫다/아내는 날 생각하고 있을까/이런 생각을 하며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나 혼자만 살아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한다/자꾸 유치한 생각만 하게 된다” (‘살아 있다는 거’ 전문)

“가끔 기억에서 오늘이 사라지기 때문에/오늘에 집착한다/아내의 치마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내 곁을 떠난 것 같다/오늘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어야 하겠다” (‘오늘이 여기 있다’ 부분)

출판사 작가정신은 이번 시집과 함께 시인이 그동안 펴낸 시집과 시선집, 산문집 등의 서문을 모은 서문집 ‘시와 살다’를 펴냈다. 또 1997년 출간된 첫 산문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를 다듬고 그동안 책으로 묶이지 않은 산문 원고를 더해 개정증보판으로 출간했다.        도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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